어느 날, 동생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이모를 좋아하는 수지와, 조카를 아끼는 이모가 만나자마자 반가움이 폭발했다. 둘은 꼭 붙어 꽁냥꽁냥 놀며 금세 둘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그 세계가 너무 단단해 보여, 괜히 내가 끼어들기 조심스러울 정도였다.
수지가 이모와 잘 놀아준 덕분에, 나와 남편은 잠시 외출을 할 수 있었다. 밖에 잠시 볼일이 있었는데 우리는 수지를 동생에게 맡기고 동네 산책도 하고 볼일을 보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남편과 오랜만에 단둘이 주말 한 낮 산책을 즐겼다.
수지 없이 둘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뭔가 낯설고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연애시절부터 수지를 낳기 전까지는 어디든 둘이 함께 다녔는데, 이제는 둘만의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다 보니 가끔 이런 시간이 생기면 무척 특별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밖으로 나가니 선선한 바람이 피부에 와닿는 감각이 기분 좋았다. 늦은 오후의 온도는 걷기에 딱 알맞게 식어있었고, 우리는 뜨거운 열기가 한풀 꺾인 날씨를 만끽함며 천천히 걸었다.
사실 이 날 외출의 목적은 로또를 사기 위해서였다. 남편은 가끔 로또를 사는데, 이 날은 꼭 사야겠다고 했다. 그런데 집 근처에는 로또판매점이 없어서 이사 오기 전, 예전에 살았던 집 근처까지 걸어갔다. 다행히 같은 동네라 멀지 않았고, 걸어서 왕복 25분 정도 걸리는 정도였다.
급할 것도 없으니 우리는 천천히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예전에 살았던 집 근처에 가니, 자연스럽게 그 시절이 추억이 떠올랐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살던 곳이지만, 이사를 하고 나니 한동안 찾지 않다가 오랜만에 다시 가보니 익숙하면서도 왠지 낯선 기분이 들었다. 그 묘한 감각도 함께 나눌 수 있어 좋았다.
우리가 함께 쌓아온 추억이 많아서, 어딜 가든 그때의 기억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지금 살고 있는 이 동네에서도 벌써 꽤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수지가 뱃속에 있을 때 이사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으니 어느덧 6년째다.
산책을 하다 보니 곳곳에서 우리의 추억들이 묻어 있는 장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기억들을 하나씩 되새기며 걷는 길이 따뜻하고 좋았다.
그렇게 추억을 이야기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인 로또판매점에 도착했다. 남편은 자동 1장, 수동 1장을 샀는데, 수동 번호를 고를 때는 마치 시험을 치는 것처럼 진지해서 웃음이 나왔다.
내가 남편에게 "시험 치는 것 같다"라고 하자, 남편은 "지금 이 로또가 시험보다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그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고 남편은 진지한 얼굴로 번호를 적어 내려갔다. 그렇게 신중히 고른 후, 로또 종이를 소중히 챙겨 들고 가게를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렇게 오랜 시간 대화를 이어가면서도 아직도 서로 할 말이 많다는 게 신기했고, 그 사실이 왠지 더 기분 좋았다.
특별한 주제가 없어도, 남편과는 뭐든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참 좋다. 함께 있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고 소소한 대화도 즐겁게 이어갈 수 있다는 게 큰 행복으로 다가온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잘 들어주고, 반응해 주고, 또 대답해 주는 남편은 언제나 나의 가장 좋은 대화상대다. 함께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남편은 정말 둘도 없는 친한 친구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은 그 누구보다 의지되고 든든하며, 편안한 친구 같다. 내 인생에서 가장 친하고 좋은 친구가 남편이라는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단단해진다.
대화로 가득했던 남편과의 여유로운 산책은 소소하지만 무척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이 사랑 안에서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남편이라는 소중한 존재에 대한 감사함을 다시 한번 느꼈다. 평생 든든하고 편안한 친구로, 곁에 오래오래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