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버른은 본질적으로 골목길의 도시다. 시드니가 화려한 하버브리지와 오페라하우스로 대표되는 거대 랜드마크의 도시라면, 멜버른은 작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만들어낸 미로 같은 도시 구조가 그 정체성을 형성한다.
멜버른에 골목길이 많은 데에는 역사적, 도시계획적 이유가 있다. 19세기 골드러시 시대에 급속히 성장한 멜버른은 로버트 호든의 '그리드 플랜'(Grid Plan)에 따라 설계되었다. 이 계획은 넓은 메인 스트리트와 작은 서비스 레인(service lane)으로 구성된 격자형 구조를 기반으로 했다. 원래 이 좁은 서비스 레인들은 마차가 지나가고, 쓰레기를 수거하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서비스 레인들은 본래의 기능을 넘어 도시의 문화적 공간으로 진화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멜버른 시의회가 추진한 '레인웨이 활성화 프로젝트'(Laneway Revitalization Project)는 이 버려진 골목길들을 카페, 바, 부티크, 갤러리로 가득 찬 활기찬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글은 2019년 2월 방문 시 올린 페이스북 포스팅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여행기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도시를 건축환경과 브랜드 관점에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 같다.
시드니 vs 멜버른: 두 도시의 문화적 정체성
호주의 두 거대 도시, 시드니와 멜버른은 오랫동안 라이벌 관계를 유지해 왔다. 단순한 스포츠 경쟁을 넘어, 두 도시는 완전히 다른 문화적 정체성을 발전시켜 왔다. 이 차이는 단순히 스테레오타입이 아닌, 각 도시의 역사, 지리, 도시 계획에 뿌리를 둔 실제적인 차이다.
시드니는 그 자연적 아름다움으로 먼저 다가온다. 햇살이 내리쬐는 해변들, 웅장한 하버브리지, 그리고 상징적인 오페라하우스가 도시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시드니는 '보이기 위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패션, 외모, 그리고 사회적 지위가 시드니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시드니의 나이트라이프는 화려하고 과시적인 경향이 있다. 킹스 크로스와 같은 유흥가는 밝은 네온사인, 럭셔리 클럽, 그리고 보이기 위한 소비문화를 대표한다. 시드니의 상업 공간은 대형 쇼핑몰과 럭셔리 브랜드 매장이 주를 이룬다.
시드니의 비즈니스 문화 역시 금융, 부동산, 기업 서비스에 집중되어 있다. 시드니는 호주의 경제 수도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도시 경관도 고층 오피스 빌딩과 화려한 상업 지구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멜버른은 '발견되기 위한' 도시다. 표면적으로는 시드니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그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무한한 문화적 보석들을 발견할 수 있다. 멜버른은 호주의 문화, 예술, 음식, 커피의 수도로 불린다.
멜버른의 나이트라이프는 시드니와 달리 숨겨진 바, 루프탑 가든, 그리고 비밀스러운 스피크이지(speakeasy) 바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의 문화는 '아는 사람만 아는' 독점적 지식에 가치를 둔다. 유명 관광지보다는 로컬들이 즐겨 찾는 숨겨진 장소를 찾아다니는 것이 멜버른 문화의 핵심이다.
멜버른의 경제는 창의 산업, 디자인, 교육, 그리고 소규모 창업에 더 집중되어 있다. 대기업보다는 독립적인 비즈니스, 스타트업, 그리고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가 멜버른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러한 이유는 두 도시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시드니는 호주 최초의 유럽인 정착지로, 외부 세계와의 연결을 중시하는 항구 도시로 발전했다. 반면 멜버른은 골드러시 시대에 급격히 성장하며 내륙 도시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멜버른 전체의 정체성이 필요한 이유는 시드니와의 경쟁 관계 때문이기도 하다. 멜버른은 작은 도시에서 1860년대 금광이 발견된 후 시드니와 경쟁하는 대도시로 성장한 신흥 도시다. 후발 주자기에 2등 도시 특유의 경쟁심을 갖고 있다. 1901년에 호주 연방이 형성된 후, 수도 선정 작업에서 멜버른과 시드니가 치열하게 경쟁했지만, 1908년 호주 정부는 두 도시의 중간 지점에 있는 캔버라를 수도로 정해버렸다.
시드니가 외향적이고 국제적인 도시라면, 멜버른은 더 내향적이고 자기 성찰적인 도시다. 시드니는 자연과 경관의 도시라면, 멜버른은 건축과 디자인의 도시다. 시드니가 햇살과 해변의 도시라면, 멜버른은 비와 커피의 도시다.
이런 차이는 두 도시의 힙스터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시드니의 힙스터 문화가 보닥 비치, 서퍼들의 라이프스타일, 그리고 해변 카페를 중심으로 발전했다면, 멜버른의 힙스터 문화는 골목길, 창의적 공간, 그리고 로컬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마을의 집합체, 멜버른
멜버른에 대한 첫인상은 놀랍게도 '작은 마을'이었다. 인구 5백만의 대도시이고 CBD에 고층건물과 크레인이 즐비하지만, 실제로 걷다 보면 이 도시가 마을 단위로 움직인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실 우리가 멜버른이라고 부르는 대도시는 행정적으로는 하나의 도시가 아니다. 멜버른 메트로폴리턴 에어리어(Melbourne Metropolitan Area)는 시티 오브 멜버른(City of Melbourne)을 중심으로 31개의 독립된 도시를 묶은 지리적 표현이다. 가로 9개 블록, 세로 9개 블록 규모의 작은 CBD 지역을 걸어 나가면 금방 칼턴(Carlton), 콜링우드(Collingwood), 피츠로이(Fitzroy), 리치먼드(Richmond), 세인트 킬다(St. Kilda), 노스 멜버른(North Melbourne), 사우스 멜버른(South Melbourne) 등 교외 도시(Suburb)로 들어선다.
멜버른의 소도시(동네)는 뉴욕과 같이 비슷한 전통을 가진 대도시의 행정구역보다 더 정체성이 강하고 독립적이다. 지역 주민들은 자신과 동네를 동일시할 정도로 강한 소속감을 가지고 있으며, 동네 전통이 얼마나 강한지 멜버른 주민 사이에서는 태어나서 같은 동네에서 평생을 사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고 한다.
피츠로이의 숨겨진 보물들
멜버른, 특히 피츠로이(Fitzroy) 지역은 이러한 골목길 문화의 중심지로, 전 세계 힙스터들의 성지로 불리는 곳이다. 호주의 많은 도시들이 그렇듯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독특한 문화와 철학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피츠로이에 위치한 세계적인 스킨케어 브랜드 '이솝'의 본사는 그 자체로 이 지역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밖에서 보면 아무런 사인도 없는 소박하고 쿨한 건물이지만, 그 안에는 브랜드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건물 내부 벽면에는 버지니아 울프의 도발적인 질문이 적혀 있다:
"Why are women so much more interesting to men than men to women?" (왜 여성은 남성에게 그토록 흥미로운 존재인 반면, 남성은 여성에게 그렇지 않은가?)
단순한 화장품 회사가 아닌 문화와 철학을 담은 브랜드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이솝은 '작은 도시, 큰 기업'이라는 멜버른의 특징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예시다.
피츠로이에는 'Page Two'라는 멋진 헌책방이 있다. 이름부터 문학적 감성이 느껴지는 이곳은 특히 1950-60년대 비트 세대 문학의 보고다. 서점 주인장은 1960년대에 대학생이었지만 반전운동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그가 비트 세대 클래식들을 찾아주니 더욱 신뢰가 간다.
이곳에서 구입한 책 리스트만 봐도 그 가치를 알 수 있다:
Jack Kerouac, On the Road
William Burroughs, Naked Lunch
Bill Morgan, I Celebrate Myself: The Somewhat Private Life of Allen Ginsberg
Park Honan, ed., The Beats: An Anthology of 'Beat' Writing
비트 세대를 주도한 작가들은 대부분 같은 대학 친구들이었다고 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영화 '킬 유어 달링'에서도 잘 묘사되어 있다.
멜버른의 힙스터 문화
멜버른은 바버숍 문화가 발달한 곳이다. 단순한 이발소가 아닌 남성 그루밍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바버숍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아직 한국에는 제대로 정착하지 않은 문화다. 다양한 해외 트렌드가 빠르게 유입되는 한국에서 유독 남성 바버숍 문화만 더디게 도입되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멜버른의 힙스터 거리를 걷다 보면 흥미로운 문구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한 옷가게 앞에 붙은 사인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모든 게 내 책임이다. 내가 나서 고치겠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사인에 대한 행인들의 낙서다:
"독약 같은 엘리트 오만."
"서양인의 개인주의 난센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각각 대중주의 우파, 유교주의 우파, 기독교 우파의 시각을 보여주는 듯한 이 낙서들은 멜버른의 다양한 사상과 문화적 충돌을 보여준다. 사인의 저자는 아마도 진보적 개인주의자, 혹은 '강남 좌파'적 성향을 가진 사람으로 보인다.
멜버른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라이프스타일 도시'다. 1960년대 반문화/저항문화/히피문화의 흔적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다. 이런 문화적 DNA가 오늘날 멜버른을 창의적이고 진보적인 도시로 만들었다.
이곳에서 배울 점은 단순히 외형적인 트렌드가 아닌, 그 안에 담긴 철학과 가치다. 작은 서점, 무심한 듯 쿨한 브랜드 본사, 철학이 담긴 거리 문구까지. 이 모든 것이 멜버른을 진정한 '힙스터 성지'로 만드는 요소들이다.
방문객으로서 멜버른을 제대로 경험하려면 번화가보다는 피츠로이 같은 교외 지역의 골목길을 걸으며, 그 안에 숨겨진 보물들을 찾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곳에서 진정한 멜버른의 영혼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