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oman Sep 12. 2017

<덩케르크>-각기 다른 영웅

스크린 안에 다른 시간과 다른 관점들을 성공적으로 통합하다

스포일러로 가득합니다.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은 일단 피해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쟁 영화로서는 유일무이한 실험적 시도를 강행했고, 영상면에서 성공한 반면에 극화로서는 과감하게 사랑받기를 포기한 듯, 스토리를 최대한 압축했다.


덩케르크는 긴박감이 계속 시차를 두고 증폭되어가는 영화다. 각기 속해 있는 전쟁 상황 속에서 다른 시차와 다른 관점을 자연스럽게 통합했다.

1주일의 시간과 1일, 1시간의 각각의 주인공

시차 포개기의 기술은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장기로써, 메멘토에서는 계속 과거로 시점을 순간순간 옮겨 가는 방식. 인셉션에서는 실제 시간과 꿈의 시간, 꿈에서 꾸는 꿈의 시간으로 가상적인 시간대를 중첩하는 방식. 인터스텔라에서는 지구의 시간과 블랙홀을 경유하면서 급격하게 왜곡되는 우주의 시간을 중첩하는 방식. 세 가지로 나타나 흥행과 평론 양쪽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인터스텔라 이후에 놀란 감독이 결국에는 이와 같은 시간 차를 다룬 작품을 한번 더 만들 것 같다는 예감이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덩케르크가 이를 다시 변주한 작품으로 나왔다. 이 다음 작품은 어떤 방식으로 시간을 비틀어 꺾을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전쟁 영화로서는 유일무이한 실험적 시도를 강행했고, 영상면에서 성공한 반면에 극화로서는 과감하게 사랑받기를 포기한 듯, 스토리를 최대한 압축했다.


민관이 일치단결했기에 수십만 명의 군인들이 절체절명의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각기 다른 관점과 시간대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협력했기에 대규모의 철수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다.

그들은 패잔병으로 비난받지 않고 환영 받았다.

단선적으로 스토리를 정리해보자면 사실 내용은 공익광고같이 심심하다. 약간의 반전과 스릴을 위한 장치도 시간 순차적으로만 정리한다면 소박하다. 배우들의 연기력의 힘보다, 편집과 통합, 타이밍, 영상의 요소들이 보다 중요했다. 그러므로, 스토리 그 자체에 신경이 더 기울어진다면 김이 빠질 수도 있다. 다큐멘터리와도 같은 건조함도 흐른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독일군의 공격을 받아 덩케르크 해안에 4십만 명이 후퇴하여 집결한 채, 철수시킬 배들을 기다리고 있다. 구축함을 갖다 대기에는 해안가 바다의 수심이 낮고, 배에 태우기 위해서 일렬로 길게 나와 있는 부두는 쉬운 공습의 타깃이 된다.

구축함까지 늘어진 긴 행렬은 그 자체로 위험이었다.

이에 영국군은 일반 소형 선박들을 징발하여 덩케르크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집결부터 구출까지 1주일의 시간이 흐르는데, 징발된 선박이 해안까지 도착하고 군인들을 구출하는데 걸린 시간은 1일이고, 해안 근처에 도착한 영국군의 전투기는 독일군의 전투기와 폭격기를 격추한 뒤에 항공유가 떨어져 적진에 착륙하기까지 1시간을 활동한다.


이 세가지의 각기 다른 시간과 관점을 가진 내용이 초반부부터 동시에 교차되는 마술이 펼쳐졌다.


덩케르크 해안에서 철수작전을 벌이고 있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처해 있는 긴박함과 긴장감을 단 몇 분간의 장면을 통해서 잘 알려주었다. '물도 마셔보지 못한 지 오래되었어요. 쫓기고 있어요, 저격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요.' 대사 없이도 이 같은 상황을 단번에 알게 된 그 순간, 영국 군인들이 총성 한방에 맹렬하게 뛰어다니게 되고,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총에 맞아 쓰러지기 시작한다.

그는 살기 위해 뛰고 헤엄치고, 눈치를 살피고, 트릭도 쓴다.

결국에 벽을 넘고 집을 돌파해서 가마니를 쌓아 만든 진지까지 도망친 단 한 명만이 살아남는다. 이런 방식으로 영화는 긴장을 유도하며, 자비나 협상이란 것이 없는 전쟁의 참화를 날 것 그대로 전달했다.


그가 해안가로 나와보니 수많은 군인들이 정처 없이 해안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길고도 긴 줄을 수없이 만들고 서 있다. 이 즈음에 약간의 허탈하고 잠잠한 시간이 흐르다 갑작스러운 폭격기의 폭탄 투하가 벌어진다.

이 해안에 폭격이 벌어질 때, 해안가에 생존해서 도착한 이 한 명의 군인과 관객들의 바로 앞에서 폭격이 멈추는 씬은 순식간에 관객들을 이 영화 속 세계로 밀어 넣는다. 라라 랜드에서 교통 혼잡 씬이 이 같은 마법을 성공시켰다면,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 폭격 씬으로 비슷한 마법을 부렸다. 이 이후부터 관객들은 각각의 영상 속으로 몰입당했다.


이 첫 부분부터 이 영화가 대사를 몹시 아끼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긴박감을 강조하기 위해서 전황이 자세하게 설명된 것도 없다. 대사가 좀 많았던 인물은 단 두 명 정도로 구출을 현장에서 지휘한 장군과 탈출하던 구축함이 침몰된 뒤에 일반 선박에 구출되어서 히스테리를 부리다가, 선장의 둘째 아들을 몸싸움 중에 죽인 길리언 머피가 연기한 장교다.

패배자의 모습을 연기한다.

그는 이런 정신적인 불안을 잘 연기하는 배우다. 외면적으로는 얼핏 강하고 원칙이 있는 존재처럼 보였지만, 그다지 강인하지 못했던 내면의 붕괴로 인해서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역할이다. 전쟁의 비극을 다룬 것이다. 패배감을 가득 담은 트라우마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은 군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시간 차를 3개로 나누어서 만들지 않았다면, 이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불릴 수 있는 사람은 항공유가 떨어져 가는 추락 직전의 전투기를 귀환시키지 않고, 덩케르크 해안에서 배와 군인을 폭격하려 출격한 독일군 폭격기를 끝까지 추락시킨 뒤에 적진에 홀로 남아 포로가 된, 톰 하디가 연기한 영국군 전투기 조종사이다. 그의 영웅적인 행적이 중심 내용이었다면, 그저 뻔한 스펙터클한 전쟁 영화 중에 하나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각자가 속해 있는 관점을 통합하고 여러 가지의 이야기를 압축해서 매우 효율적으로 담은 고유의 영화로 남았다". 철수 작전에 참여한 각기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낸 각각의 영웅적인 시간들을 중점적으로 연결 지으면서, 대다수의 유사한 영화에서 소외되었을 법한 철수작전의 엑스트라를 모두 주연으로 제대로 되살렸다.


1. 징발된 배에 올라타기까지 쉼 없이 살아남을 길을 찾기만 했고, 철수해서 살아남은 패잔병들도 결국에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만든 이들이었고, 그 어떤 영웅을 떠나서도 먼저 평가받아야 할 영웅임을 알린다. 이들이 살아서 돌아가고자 하지 않았다면, 성공적인 철수 자체는 불가했다. 영화 중간에 바닷속으로 홀로 걸어 들어가면서 자살을 시도하는 병사의 모습이 하나 나온다. 이 병사와 같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면, 철수 작전은 당연히 실패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철수 후에 이들에게 담요를 나눠주던 맹인이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군인에게 패배란 져서 퇴각하는 게 아니라 절망해서 멈추는 것이다. 그 패배자의 표본은 길리언 머피가 연기했다.

정처없이 바다로 들어가는 한없이 허탈한 장면이다.

2. "내가 먼저 산 뒤에 남을 살린다"라고 영국군만을 우선 철수시킨 후에서야, 덩케르크에 그대로 남아 프랑스군의 철수까지 지휘하기로 결정한 장군도 영웅적이다. 그는 순서를 명확히 세우고, 현장에서의 책임을 보다 넓은 범위에서 지고 행동한 훌륭한 군인이었다. 프랑스 군인들은 이 영화 속에서 계속 이방인 취급받다가 그 덕분에 막판에 약간의 배려를 받는다. 영어를 모국어로 써야만 배려를 받는 구도였다.

야박한 인심의 영국군 지휘관에서 성공적인 리더로 변모한다.

3. 정부에 의해서 징발되었지만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구출 작전에 참여해서 패잔병들을 구하고자 했고, 이 과정에서 큰 희생을 감수한 선박의 선주와 선원들도 영웅들이다. 자발적으로 배를 몰고 나선 민간인 선장 중에 하나는 자신의 둘째 아들이 희생당하지만, 이 때문에 철수 작전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거나, 맹렬하게 정부에 항의하거나, 아들을 죽게 한 군인에게 복수하지 않고, 묵묵히 철수 작업을 마친다. 그 이후에 그 아들은 영웅으로 신문 지상에 발표된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 그저 자연스럽지만은 않지만 그 희생을 감당한 모습도 영웅답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4. 톰 하디가 맡은 전투기 조종사는 항공유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충분히 기수를 돌려 복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독일군의 전투기와 폭격기를 격추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아군이 죽거나 철수 작전이 실패한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다. 떨어져 가는 항공유 확인도 그만둔 채 독일 폭격기들을 격추하며, 배에 올라타던 군인들의 환호성을 낳는다. 정처 없이 무동력의 비행을 하다 적진에 불시착한 뒤에 전투기를 불태우는 그의 주도면밀함까지 보자면, 말 그대로 전형적인 전쟁 영웅이란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타고온 전투기를 태워버린다. 다가오는 독일군의 모습 앞에서도 여유롭다.

5. 각기 다른 시점은 3개지만 이야기를 쪼개 보면 입장과 관점은 조금은 더 다채롭다.

여러 군인이 같이 탔던 고깃배가 물 위로 떠오르는 중에 영국군이 아닌 것이 드러난 프랑스군을 박대하고, 자신만의 생존을 노골적으로 챙기며, 맹렬하게 좀 더 많은 타인을 어떤 방식으로든 더 위험으로 몰아넣어야만 자신이 안전해진다고 믿고 행동하는 군인도 나온다.


통상 이런 사람이 더 보란 듯이 잘 살아남는 게 현실이지만, 영화 속에서 그는 바다 위에서 불에 휩싸여서 죽는다. 영국 군복을 입고서 입을 다문채 영국군인척 했던 프랑스 군인은 구멍 뚫린 네덜란드 선장의 배가 가라앉을 때 탈출하지 못한다. 마치 징벌이라도 받은 듯이.

그도 살고자 했을 뿐인데, 왜...

전형적인 스펙터클 전쟁 영화는 톰 하디가 열연한 전쟁 영웅의 활약상만을 보여주기 마련이지만, 이 영화는 그보다는 정말로 찌질하게 살기 위해서 이리저리 휘말리는 일반병을 다루는데 일주일, 선의로 가득한 일반인 선주에게 1일을 주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물론, 전쟁 영웅에게 할애된 1시간은 전쟁 씬이 중심이 된 시간이며, 이 세 가지의 다른 시간이 통합되는 가장 치열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중심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살기 위한 본능과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인간성이 우리가 계속 살아가는데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 일깨운다. 누가 죽거나 다치거나 아무 관심없이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스마트폰 문명의 현대인에게 던지는 진정성 어린 메시지가 있었다. 살아남고 살아남게 한 것만으로도 영웅이다.


그러나 이 평온한 현실 속에서 우린 아군을 향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취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좀 더 높은 수익을 위해, 자존심을 위해, 권력을 잡기 위해, 연애의 감정 때문에, 정치적인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그외 기타 등등의 이유로 우린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전 11화 <블랙 팬서>-폐쇄주의 탈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