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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 시작 Jan 25. 2024

장애라는 세상

그림 : 작가, 제목 미상_ '플라마리옹 판화'

'기대하고 다짐한 대로 인생 이루어지지 않는다'

3월로 예상한 퇴원은 4월로 미루어졌고, 결국 200일도 병원에서 보내게 되었다. 항생제 치료를 더 해야 한다는 감염내과 주치의에게 조르고 졸라 퇴원 일정을 결정했다.

두 달여간의 병동 입원 생활은 나와 셋째에게 여러모로 유의미한 시간이 되었다. 한 시도 떨어지지 않으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셋째의 여러 모습을 더 자세히 보고 느낄 수 있었으며, 힘껏 안아주고, 듬뿍 사랑해 주었다. 5개월 동안 교감하지 못했던 시간을 충만하게 채수 있었다. 또한 규칙적인 병동 생활 덕분에 이른 새벽에 일어나 따뜻한 차를 마시며 여유롭게 책을 읽을 수도 있었고, 오전 시간병원에서 계획한 일정대로 다양한 검사와 진료를 보기도 했다. 점심 식사 이후에는 함께 느긋한 낮잠 시간을 가져보기도 하고, 유아차와 링거 폴대를 끌고 다니며 병원 산책을 다니기도 했다. 작고 폐쇄된 공간이지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충분히 누리며 함께 있는 시간을 즐겁고, 의미 있게 보내려 노력했다.

입원 기간 동안 재활 치료도 받고, 엄마가 해줄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의 돌봄을 훈련해보기도 한다.

퇴원 일정이 정해진 뒤로는 마음이 급해졌다. 수술 후 집에 돌아와 한차례 어려운 고비를 경험했던 터라 어느 때보다 돌봄을 위한 준비와 훈련이 절실했다. 병동 생활을 하면서 느낀 여러 가지 경험 중 한 가지는 의료진은 환자의 미래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이 없다는 것. 의료진은 지금의 환자 상태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첫 수술을 할 때도 그랬다. 수술이 잘 끝났고, 일주일 지켜본 결과 특이 사항이 없으니 그대로 집으로 돌려보냈다. 다만 지난번 퇴원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집에 돌아갔을 때 병원에서와 다른 모습을 보인다면 지체하지 않고 서울 병원 응급실로 오라는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우리 가족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미래는 셋째의 장애였다. 훗날 노력 여하에 따라 장애가 사라진다 해도 지금의 셋째는 장애를 가지고 있는 상태다. 아주 어리기 때문에 뇌 가소성이 높다는 것 외에 셋째의 현 상황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장애아를 키우는 가족은 대개 아이의 장애를 인정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른바 장애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의 시간이 반드시 있게 마련인데, 그러한 과정 속에서 장애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일은 무척 중요한 일이자 미래 그 자체였다.

나에게 있어 장애란 어떤 의미였을까. 나와는 상관없는, 알고 싶지도, 알 필요도 없는 세상이었다. 내 세상엔 장애란 없었다. 뇌손상을 안 순간부터 어쩌면 장애는 운명이었다. 그럼에도 장애를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장애 판정을 받고 난 뒤로도 언제든 ‘정상’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재활과 노력에도 셋째는 ‘정상’의 범주에 근접해지지 않았다. 나와 우리 가족은 희망이란 가치가 무력해지는 경험을 매 순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경험에는 이면이 존재한다. 무력함 뒤에 숨겨진 7개월가량의 간병 시간 동안 우리 가족은 함께 하는 일상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누리는 일상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더 나아가 장애가 있든 없든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모두가 소중한 존재임을 서서히 깨달아 갔다.

다가오는 셋째의 첫 번째 생일, 그 어느 때보다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 3박 4일 일정의 제주도 여행을 계획했다. 병동에 있을 때 생각했다. 온 가족의 첫 여행지로 제주도를 가야겠다고. 짧은 기간의 여행이지만 셋째와 함께 하는 여행은 우리 가족에게 크나큰 도전의 시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셋째의 컨디션을 세심히 살펴야 했고, 셋째의 상황을 고려한 일정에 기반한 여행이 되어야 했다.


제주도 여행은 내가 살았던 세상과 장애라는 세상이 하나가 되어 우리의 세상이 되어가는 첫걸음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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