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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 시작 Feb 01. 2024

두 개의 세상에서 첫걸음

2018년, 처음 제주도 한 달 살기를 다짐하던 그때는 머지않아 제주도에 다녀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임용고시 불합격과 동시에 셋째가 잉태되었고, 태어나자마자 셋째에게서 벌어진 예상치 못한 고난들을 겪고 나니 5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고 만 것이다. 어쩌면 셋째가 아프게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내게서 제주도는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내게서 다시금 제주도 한 달 살기를 다짐하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두 개의 세상의 경계에 선 우리 가족이 수많은 역경과 혼돈을 이겨내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란 희망 덕분이었을까.

7개월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땐 장애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극복이 가능한 것이라 믿었다. 다방면으로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정상’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셋째의 장애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의료진이 보호자인 내게 전해 준 상태보다 훨씬 정도가 심각했다. 이사 후 병원을 옮기고, 재활의학과 첫 진료를 보았을 때 담당 교수 역시 ‘아직 어리다’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그래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3번째 외래 진료를 봤을 때 담당 교수는 장애 등급 판정을 권유하였다. 3박 4일의 짧은 일정의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후였고, 셋째와 우리 가족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볼 생각이었다. 아주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었기에 장애 등급 판정을 위해 필요한 서류들을 꼼꼼히 준비하여 동사무소에 제출하였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장애 등급이 결정되었다. 과거 1~6등급으로 나뉘었던 장애 등급은 심하지 않은 장애와 심한 장애로 나뉘었고, 셋째는 뇌병변 ‘심한 장애 정도’로 판정되었다. 판정 후에도 담당 교수는 장애 변동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훗날을 기약하자고 말하였다. 그러니 모든 것이 희망적인 때였다. 사회가 정해놓은 장애의 척도로 셋째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장애 정도를 인지하고, 셋째에게 필요한 지원을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셋째의 나이가 한 살, 두 살 먹어가도 좀체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굳이 비장애 누나들과 비교하지 않아도, 같은 뇌병변 심한 장애 그룹 안에서도 발달은 더디기만 했다. 희망을 놓을 순 없었지만 엄마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 분명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느린 셋째를 보며 전전긍긍하기보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했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셋째의 장애보다 셋째 존재 그 자체를 보려고 노력했다. 미래의 불안 때문에 지금 줄 수 있는 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물론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불안을 내려놓고 더 많이 사랑해 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또한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포기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에게서 사라진 제주도가 3박 4일이라는 짧은 일정의 여행을 통해 숨 쉬게 되었고, 집으로 돌아온 뒤로도 여전히 셋째의 변화 희미해졌을지라도 제주도 한 달 살기 만큼은 더욱 선명해졌다. ‘정상’의 범주를 상정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걸을 수 있을 때 가겠다는 나름의 계획은 이제 ‘제주도 한 달 살기’라는 도전 앞에서 무색해졌기에 ‘그냥’ 가보기로 했다. 장애가 장애가 되지 않길. 장애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우리 가족이 살아갈 세상은 장애 그 자체가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장애를 부정하진 않았지만 장애만으로 귀속되고 싶진 않았다. 장애의 세상과 비장애 세상 속에서 유연하게 부유하길 바라는 마음. 그것이 내가 진정 원하는 ‘두 개의 세상’이 지닌 모습이었다. 우리는 장애와 상관없이 모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몸소 보여주고 싶었다. 장애와 관련하여 비교적 불친절한 우리나라지만 제주도와 같은 큰 관광도시는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설령 쉽지 않더라도 우리 가족이 개선의 도화선이 되길 바랐다. 그런 마음에서 제주도 한 달 살기 여행기를 글로 남기길 다짐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장애인을 위한 곳이든 그렇지 않은 곳이든 우리가 가는 곳이 어디든 길이 될 수 있길 바라며 제주도 한 달 살기를 위한 힘찬 첫걸음을 그렇게 내디뎠다.

 

장애가 있든 없든 언제나 사랑스러운 우리 셋째


신은 비극과 상실을 일으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그렇게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 가슴이 원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자신이 계획했던 삶을 기꺼이 놓아주어야 한다.'(조셉 캠벨) :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류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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