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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랭보 May 13. 2021

37년 만의 둥지 탈출

서른일곱,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들

사실 이렇게 오랫동안 엄마 품에서 살 줄은 미처 몰랐다.

몇 개월 전 독립을 엄격, 근엄, 진지하게 결심했다. 그 결심이 무색하게 퇴근 후 보러 가기로 약속한 원룸이 반나절 만에 계약이 성사되어 헛수고를 한 게 부지기수였다. "손님, 어쩌죠? 오전에 보신 분이 물건 계약을 하시게 됐어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중개사의 한 마디에 또다시 네이버 부동산 손품 팔기는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생애  독립 물건을 찾고 잃어버리기를 반복한 3개월째에 접어들자 문득 불안이 몰려왔다. 친구가 말했다. "서울이 집이고, 직장도 근처인데 뭐하러 나와서 살려고 ? 집에서  때가 편한 거야." 그럴 때마다 이러다 정말 독립을 영영 못하게 되는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론 작금의 혼란한 부동산 시장, 정부가 나서서 독립을 저지하는 기상천외한 상황도 나의 독립의지를 굽힐  없었다.


막상 내 몸 하나 뉘일 집을 구하고 나니 갑자기 시원섭섭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여의도 불꽃놀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하늘에서 팡파르가 터지고, 북소리가 나는 광명의 날을 상상했었다. 그런데 생각 외로 계약금을 입금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생각보다 마음이 너무 잔잔하고 고요한 것이다. 이런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때를 거슬러보니, 지금으로 부터 10년도 전에 교환학생으로 난생처음 집 떠나 타국살이를 할 때가 생각이 났다. 그때가 엄마랑 사이가 가장 좋았던 것 같다. 서로 너무 애틋했다. 그래도 그때는 8개월 시한부였으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이번 독립은 temporary가 아닌 영구적인 것이니 말이다.


"어차피 결혼하면 나가서 살게 될 텐데. 네가 언제까지 엄마랑 살 것 같아? 몇 년 안 남았어."

"나오면 고생이야. 그리도 돈도 이만저만 새는 게 아니야. 시집가기 전엔 한창 돈 모을 나이잖아?"

"나 오피스텔 가다가 밤에 변태 만난 거 기억하지? 가족이랑 같이 살아야 안전하다."

독립을 막는 것은 비단 엄마뿐이 아니었다. 대학 때문에 서울에 올라와 20살부터 타향살이를 하는 학교 친구들, 회사생활을 하면서 빨래가 잘 마르는 베란다가 있고, 볕이 드는 공간에 살고 싶다는 회사 동료는 경제적인 문제, 환경적인 열악함, 주거안전 등을 이유로 나의 독립을 말렸다. 그럴 때마다 나가 살고 싶다는 바람이 마치 사춘기 소녀의 치기 어린 반항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엄마, 나 진짜 나가 살아야 할 것 같다. 결혼할 것도 아니고 어차피 엄마가 나이 들면 내가 수발들고 살아야 할 텐데 그럼 나는 언제 혼자 살아보나." 모친에게 하기엔 조금 비수 섞인 말일 수도 있겠으나 저건 1도 틀리지 않은 마음속 진심이었다. 완강히 반대의사를 표시하던 예전과 달리 이번엔 엄마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혼자 살 때 됐지. 니 나이가 서른일곱이라고? 아이고 세상에. 내가 너무 오래 살았구나." 라며 과년한 딸의 팔자를 애석해하는 말투였지만, 엄마도 이제는 많이 내려놓고 포기한 상태라는 게 느껴진다. 때마침 시기적으로도 방송에서 싱글로 사는 연예인들이 뒤늦게라도 독립하여 혼자 사는 내용을 테마로 예능프로그램이 많이 나왔다. 우리 모녀는 이런 프로그램의 애청자이기도 했다.


나에게 있어 그동안의 '독립'이 잡히지 않는 꿈에 불과했다는 건 '경제적으로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점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이 모든 게 판단의 문제였을까? 행동하지 않았기에 실행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독립에 대한 열망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변을 돌아보니 경제적 준비고 뭐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빚을 지고 돈을 쪼개며 고단한 독립 라이프를 오래전에 시작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나는 입으로만 '독립'을 떠들었을지 모른다. 운이 좋게도(?) 한 달 쓰는 커피, 술값보다 싼 신용대출을 제공해주시는 주거래 은행님과 정년보장으로 두 다리가 묶여 젊은 날을 저당 잡힌(더 이상 젊지도 않다만) 회사께서 월급에서 빚을 제하고 대출을 선뜻해주었다. 너 빨리 나가 살지 않으면 크게 혼쭐날 줄 알라고 말이다. 그 대신 그동안 미룰 대로 미뤄온 재정관리, 집안 청소, 빨래 모든 일은 온전히 내 몫이라는 당부와 함께.


어쩌면 독립을 막는 가장 큰 원인은 나 자신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혹시나 생각하지도 않았던 결혼을 하게 된다면? 결혼하려면 돈이 많이 들 텐데 그냥 차곡차곡 모아야 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독립하지 말아야 할 몇 개의 이유로 의사결정을 미뤄온 것이다. 손에 잡히지도 않을 신기루 같은 미래 때문에 항상 현재의 불편, 불만 등을 손에 움켜쥐고 살고 있었다. 불만이 있는 건 맘에 들지 않는 커리어와 직장생활 하나면 차고 족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난생처음 드럼세탁기를 돌리며 지난밤 친구가 사다 놓은 편의점 행사 맥주 500ml를 따라 자축하고 있다. 나에게 불멍보다 좋은 건 빨래 멍인 것 같다. 잘 모르겠지만 지금 이 시간만큼은 행복한 것 같다.

불멍보다는 풀옵션이 혜택을 누리는 드럼세탁기 빨래멍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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