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소개 시간
꿈을 향해 분투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아이였다. 드문드문 출판사 직원, 기자, 드라마 pd를 꿈꾼 적도 있었으나, 금세 사그라들었다. 매사에 맹탕맹탕한 편이었다. 사법시험을 본 것도 아버지가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원하는 것을 관철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아버지를 이길 자신도 없었거니와, 아버지와 싸워볼 만큼 갈망하는 것도 없었으므로, 일단 시험을 봐보기로 했다. 열정은 미지근하였으나, 소심하고 겁이 많은 성격은 성실함의 원동력이 되었다. 성실함 덕분으로 합격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목표였던 사법시험 합격을 이루고 나자, 인생의 목표가 더는 없었다. 그렇게, 지금은 그냥 그런, 보통의 변호사가 되었다.
연수원을 수료하고 취업시장에 나와 제일 많이 들은 질문은 왜 국문과를 나와서 왜 사법시험을 봤느냐는 질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에는 대부분 법대생이 사법시험을 보는 것이 일반적인 루트였으므로, 면접관이 보기에 다소 특이해서 물었을 뿐, 대단히 그것이 궁금해서 물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면접장에서의 일종의 스몰토크랄까. 그러므로, 차라리 솔직과 가식을 적절히 믹스해서, '집에서 원해서 되긴 했지만, 막상 해보니 적성에 맞다' 정도로 무난하게 대답을 했으면 됐을 일인데, 그러나 그때는 '아버지가 하라고 해서 했습니다'라는 대답을 하지 않으려면 어떻든지 아귀가 맞는 대답을 지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문학작품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쌓았다. 이런 내가 법을 공부하면,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변호사를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시험을 보게 되었다'라고 정성스러운 개소리를 하였다. 당시에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는데, 면접관의 눈을 보니, 그의 마음도 내게서 멀어졌다. 그때가 내 나이 서른이었다.
올해 만으로 마흔이 됐다. 십 년 동안, 고용변으로도 있어봤고, 사내변으로도 있어보았으며, 이제는 개업변이 되었다. 십 년 간의 진로 탐색 과정을 통해 나의 천직을 찾았다면 참으로 더할 수 없이 값진 시간이었을 텐데, 십년의 시간이 내게 남긴 것은 '변호사가 나의 천직은 아닌가'라는 의구심과 조바심이다.
불혹의 나이에 천직은 아직도 모르겠지만, 마흔이 되는 과정에서 얻게 된 나름의 소득도 있다. 국문과지만 사법시험을 본 것이 독립된 인간으로서 기똥찬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가 결정한 것이라는 시덥지 않은 사실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남들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잘 모르는 사람한테 이러한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국문과를 간 것인지를 궁금해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수능 성적에 맞춘 것이었다. 나의 인생은, 이토록 히마리가 없는 주인을 만난 탓으로,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줏대없이 흘렀다.
그러나, 오늘의 이 고백은 히마리가 있다. 왜냐하면 비로소 바람에 맞서서 걸어볼 요량으로 이 고백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 십년만 더 살면 반백살인데, 순수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해봐도 괜찮잖아, 라는 마음이 들었다.
무엇을 하면 좋을까, 궁리를 하다가, 쓸모는 별로일 수 있는 변호사 잡담을 써보기로 했다. 쓸모 있는 법 이야기를 재미있게 쓰기에는 능력이 모자라고, 재미가 떨어지는 실용적인 글에는 스스로 영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차선책으로서 일단 쓸모를 버려 보기로 했다. 쓸모를 버렸으니, 적어도 재미라도 있어야 하는데, 재미마저 없다면, 그건 또 어쩔 수 없을 테지. 어차피 바람에 맞서는 나의 첫 독고다이니까. 10년 동안 변호사 일을 하며 눈맞춘, 당장의 실용적인 생활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권리들에 대한 시시콜콜한 에세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