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인간은 누구나 벽을 보고 살기 마련이지. 건물을 짓는 건 곧 벽을 만드는 행위니까. 그리고 자기 안에도 벽을 지어, 그 안에서 살아가. 대개 그 곳엔 몇 개의 창문이 있어. 물론 너도 가지고는 있겠지. 하지만 너는 그 창문을 열어보려고도 하지 않고 벽을 보고 누워있기만 해. 곧 넌 그 안에서 죽고 말 거야.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아침이었다. 아침볕이라기에는 게으른 가을 오후 햇볕처럼 햇살은 테이블 위에 가득 늘어져 있었다. 이미 나의 얼굴에도 한 차례 그늘이 지나간 후였을 것이다. 공기는 아무 미동도 하지 않는다. 바람도 불지 않는다. 정갈한 표정. 곧 너는 죽, 고, 말 거, 야 라고. 그녀는 내게 나름의 사형 선고를 내리면서도 조금의 눈빛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그녀가 이마에 늘어진 햇살을 인식한 듯 얼굴을 잠깐 찡그리는 순간 나는 묘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녀와 나는 룸메이트로 만나 알게 된 지 고작 일주일 정도 되었을 뿐 거의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었다. 너는 누구인가. 내게 그런 말을 하는 너는. 순간, 나는 슬쩍 손을 뻗어 그녀의 벽을 만져보고 싶었다. 나의 벽을 말하는 너는, 얼마큼의 두께를 지닌 벽을 쌓고 사는지. 내가 당신의 벽을 만져보아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 순간뿐이었다. 학생들의 지나가는 발소리. 공기는 다시 휘몰아쳤고 햇살은 따가워졌다. 우리는 일어섰다. 그 후로 나는 그녀가 한 말 따위는 잊어버렸다. 그녀의 책상과 침대는 늘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녀에게 특이할 만한 게 있었다면 토요일 밤마다 촛불을 켜는 것이었다. 토요일 밤마다 촛불을 켤 수 있는 것만으로도 삶을 잘 살아내고 있다는 증거라고, 일렁이는 불빛은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 촛불 아래서 그녀는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고는 했다. 모든 것이 사각의 형태를 띠고 있는 평범한 기숙사였다. 사각의 벽면, 사각의 침대와 책상, 옷장, 그런 곳에서 나와 그녀는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난 사각의 벽에 닿을 때마다 움찔했고 사실 나는 동그라미가 아닐까, 하는 회의감을 느꼈다. 그녀는 대개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 꼭 새우처럼 등을 잔뜩 구부리고 벽 쪽으로 모로 누워 잠을 잤다. 고개도 몸 안쪽으로 바짝 숙이고 자는 그 모습은 때로는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가 촛불을 켤 때면 약속이나 한 듯 나는 백열등을 껐다. 하지만 그녀가 나에게 불을 꺼 줄 것을 요구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시험 전 날에도 전혀 무리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 밤 열시만 되면 공부를 하다가 졸리면 그냥 잤다. 늘 무리하게 자신을 소진시키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와 그녀는 한없이 다른 존재였다.


이 험한 세상에 그녀는 맨발로 살아가는 사람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허허벌판에 아무런 욕심 없이 살아가려 한다고. 그녀는 맑았고, 속이 들여다보였고 동시에 허허로웠다. 그것은 그녀만의 기운이었는데 난 그것을 느낄 때마다 왠지 모르게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늘 버릇처럼 자신을 ‘하루살이’라고 말했다. 하루살이. 인간이 머물 수 있는 곳은 현재뿐이라는 인식이 그녀에겐 당연했다. 지금 행복하기. 꾸미지 않기. 소탈하게 살기.


그녀는 기숙사가 답답하다며 자취를 하기 시작했다. 난 집들이를 가기로 했다. 그녀의 집은 논과 밭을 삼십 분 쯤 가야 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 날 밤, 나는 그녀의 곁에 누웠다. 그리고는 내 욕망에 깜짝 놀랐다. 그녀의, 가슴을 만져 보고 싶은 욕망. 그녀의 몸을 안고 싶은 욕망. 그 욕망에 나는 잠조차 이룰 수 없었다. 그것은 엄연한 사랑의 감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자신감이 없었다. 세상의 시선을 거슬러 올라갈 용기가 없었다. 그날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그리고 내게 다가오는 남자를 사귀기 시작했다. 자유로이 만질 수 있는 육체. 보이는 것의 명징함. 남자가 나의 몸 안을 밀고 들어 왔을 때의 단단함. 사랑해.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말했고 다리를 활짝 벌려 기꺼이 그의 존재를 몸 안에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는 얼마 후에 나를 가볍게 떠나버렸다. 이제는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와 헤어졌을 때 내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던 얼굴은 바로 그녀였다. 내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 말이 있어. 중요한 이야기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너야.”라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그녀와 내가 함께 해 온지 십 년이 되는 날이다.

이제 난 더 이상 벽 안에서 살지 않는다. 그녀 덕에 벽을 부수어 버리고 자유를 받아들였다. 사회적 통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토요일. 지금도 우리는 토요일이면 촛불을 켠다. 촛불 아래의 그녀는 너무나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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