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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 슬픔의 경계가 무너질 때

기쁨은 슬픔을 거슬러 고개를 내민다 6

by 양주안

X의 장인이자, A의 아버지, 내게는 카페 동료였던 이의 부고를 받은 날, 두 사람의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함께 들었다. 몇 달 전 태어났으나 아버지 간호하느라 누군가에게 연락할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졸지에 부고와 출생 소식을 한꺼번에 받아 들게 됐다.

딱히 순서를 정해두고 살지 않지만,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건 슬픔이다. A의 아버지와 카페에서 보낸 추억들을 메시지에 꾹꾹 눌러 담아 보냈다. 수첩에 적어둔 아르베카를 떠나기 전날 밤 앵커 한마디를 보냈다. X가 통역해 주고도 잊어버린 말들이다. 그건 내 삶에만 새겨진 것이었다.

우리의 애도는 떠난 이가 남긴 삶의 조각을 하나둘 모아 끼워 맞추는 일이었다. 30초 남짓한 멘트였다. 30초의 공백을 메꾼 기억이었다. 몇 주짜리 우정의 결실이었다. 죽은 이의 삶에 친구 하나가 더 있다는 사실 확인이었다. 몇 줄짜리 메시지였다. 몇 줄을 쓰기 위해 쓰다만 말들은 몇십 줄이었다. 커다란 슬픔을 친구와 나눈 다는 건 작은 순간에 담긴 의미를 알아가는 게 아닐까.

아직까지 이보다 더 어려운 답장은 인생에 몇 없었다. 애도를 마친 뒤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부모가 된 친구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축하한다고 할 만큼 뻔뻔한 사람은 못된다. 그렇다고 슬픔이 커서 기쁨을 내일로 미루자 말할 처지도 못된다. 차라리 내 일이라면 그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X는 아이가 태어난 날 무척 기뻤다고 했다. 아빠라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고도 했다. A는 출산을 마치고 회복하고 있었다. 아이와 엄마 모두 건강했다. 그보다 더 좋은 소식이 없었다.


축하해! A는 어때?

많이 힘들어해.


마음 같아서는 아는 모든 단어를 써서 축하하고 싶었지만 기분이 영 내키지 않았다. 가끔 메시지를 주고받는 건 참 유용한 일이라 생각했다. 섣부르고 치기 어린 말들을 한 번 다듬거나, 해야 할 말과 하지 못할 말을 구분할 만큼의 여유가 있었다. 이제껏 유용하다 여겼던 메시지와 메시지 사이 여백의 시간이 무척 답답했다.


이윽고 마음에만 담아두어야겠다고 한 말들을 문자로 채워 넣었다.


아이가 태어난 걸 축하해주고 싶기도 하고, 장인어른이 돌아가신 걸 함께 슬퍼하고도 싶어. 두 가지 다 충분하게 하고 싶은데, 도무지 표현할 길을 모르겠네. 나는 지금 무척 슬프고 기뻐, 친구.


침대에 누워 가만히 우리가 나눈 대화들을 거슬러 올랐다. 이제는 오롯이 슬픈 일도, 완전히 기쁜 일도 없다. 오래된 친구의 소식은 단지 좋거나 나쁜 이야기로 구분 짓기 어렵다. 정확히는 기쁜 것과 슬픈 것의 구분이 희미해진다. 기쁨이 슬픔을 지나쳐 얼굴을 드러내고, 슬픔이 기쁨을 거슬러 찾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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