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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연 Jul 10. 2024

비가 온다. 할머니의 요리가 생각난다.

다갈다갈 계란찜, 비 오는 날에는 팥죽

할머니는 투박한 손으로 달걀 두어 개를 깨어 간장을 툭, 소금과 설탕을 툭, 쇠 숟가락으로 대강 저어낸 다음 숟가락에 묻은 남은 한 방울까지 탁, 털어 넣었다. 할머니의 계란탕 비법은 중탕이었다. 탁탁 탁탁- 몇 번을 돌려야 불이 겨우 붙는 오래된 가스불에 불을 올리고, 바닥이 울퉁불퉁해진 낡은 노란 양은 냄비에 물을 한가득 올려 한가운데 계란탕 뚝배기를 올렸다. 


다갈다갈. 할머니의 발음 그대로 그것은 정말 '다갈다갈' 끓인 계란탕이었다. 나는 파를 싫어해서 무슨 음식이든 파를 골라내곤 했는데, 할머니의 다갈다갈 계란탕만큼은 예외였다. 물이 살짝 고인 촉촉한 계란 윗부분에 불규칙하게 올라간 파와 듬뿍 뿌려진 통깨들, 그리고 뚝배기 그릇 바닥에 살짝 탔다 싶을 정도로 노릇노릇 갈색 빛으로 바짝 익은 부분까지. 자잘한 구멍이 송송 뚫린 계란탕을 언니와 내가 앞다투어 바닥까지 박박 긁어 밥에 비벼 먹는 모습을 보며 할머니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소녀처럼 손으로 입을 가리곤 했다. 


천장이 유난히 낮은 할머니댁 주방에서 할머니의 사랑은 무한대로 펼쳐졌다. 무형의 사랑을 유형의 것으로, 젓가락으로 푹 찍어 목 아래로 꿀떡 씹어 삼킬 수 있게 만드는 것은 할머니가 가진 특권 아니었을까. 그 맛을 본 많은 이들의 마음에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 그것은 요리하는 이의 특권일 것이다. 할머니는 반찬 돌려 막기 수법뿐 아니라 한번 맛보면 잊을 수 없는 기가 막힌 맛있는 전라도 요리들을 선보이며 손녀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할머니는 뜨겁지도 않은지 프라이팬에 올라와 있는 음식들을 손으로 턱턱 뒤집곤 했다. 나는 그런 할머니의 요리법을 보고 자라서인지, 아직까지도 종종 프라이팬에 있는 것들을 맨손으로 뒤집다가 '아 뜨거워!' 외치곤 한다. 할머니 손끝에 잡힌 굳은살만큼의 경험도 없으면서, 어렴풋이 따라 하는 내 모습을 보았다면 할머니는 또 소녀처럼 웃으셨을 것이다. 


할머니를 떠올릴 수 있는 음식으로는 깨송편도 있다. 추석이 되어 할머니댁에 가면, 할머니는 전이며 찌개며 이것저것 전부 해 놓았는데 그중에서 '송편 빚기'까지 완벽하게 해 두는 날에는 우리의 성원을 들어야 했다. 송편 빚기는 언제나 우리 몫이어야 했다. 


"할머니! 이거 빚지 말랬잖아~ 우리가 한다니까!" 할머니를 도우려는 의도 따위는 없었다. 그저 지문 사이사이까지 찐득하게 스며드는 쑥떡을 떼어다가 기름을 발라 넓게 펼쳐내고, 그 안에 내가 좋아하는 깨를 욕심 내어 담뿍 넣어 문을 닫는 것이 목표였다. 깨를 얼마나 많이 넣었는지 찐득한 진한 초록색의 쑥덕 사이사이로 꿀과 깨가 쏟아져 나왔다. 결국 떡을 덧붙이고 덧붙이다 그만 우주선 모양의 우스꽝스러운 송편이 완성되곤 했다. 대형 만두가 되어버린 언니와 내 송편 옆에는, 할머니가 야무진 손으로 야무지게 빚어놓은 송편들이 먹기 좋은 크기로, 단단한 모양새를 하고 자리했다. 기껏해야 열댓 개나 만들고 그만두고 말 것을, 꼭 고집을 부려 할머니한테 미리 만들어두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으며 할머니를 괴롭히곤 했다. 할머니는 딱 그 모습들을 보려고 항상 우리 몫의 송편을 남겨 두었는지도 모르겠다. 


구멍 뚫린 받침대와 하얀 천을 깐 냄비에 송편을 찌어낸 후에는, 우린 코를 박고 깨송편을 찾아 헤맸다. 실수로 콩송편을 한 입 베어 물었다가는 으악! 하고 달려나가 마당에서 허공에 대고 테니스 스윙 연습을 하고 있는 아빠 입에 넣어 버리곤 했다. 이서방이 그저 최고인 할머니는 "예끼!" 하며 단호하게 우리를 나무랐다. 


내게 계란탕이라면, 엄마에게는 팥죽이었다. 할머니를 하면 떠오르는 음식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한테는 할머니인데, 엄마한테는 엄마다. 엄마는 할머니의 음식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 기분이 어떨지 가늠도 되지 않거니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 결혼 후 익산에서 지내던 엄마는, 비가 오는 날이면 할머니가 해주던 팥죽이 생각 나 정읍까지 한 시간씩 내달려 가곤 했다고 한다. 아빠 차를 쓸 수 없는 날에는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또다시 버스를 타서 당신의 엄마에게로. 우리는 매 주말 일이 없을 때마다 할머니댁을 함께 갔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5년 전까지만 해도 집에서 직접 팥을 쑤고 새알을 만들어 동지죽을 끓여 먹곤 했다. 언니는 새알을, 나는 칼국수를 좋아하는 탓에 할머니는 면까지 썰어야 했다. 할머니는 먼저 직접 반죽한 쫀득한 밀가루 반죽을 손가락 한 마디 크기로 잘라 동글동글 굴려 새알을 만들었고, 나머지 반은 유리병으로 납작하게 밀어낸 후 앞뒤로 가루를 묻혀가며 칼로 슥슥 썰어 면을 풀어냈다. 서로 얽힌 면들을 공중에서 두어 번 털어내면 꼬들꼬들하고 얇은, 불규칙한 면이 완성됐다. 앞으로 12월 22일 동짓날이 오면, 꼭 동지죽을 먹으며 할머니를 기억해야지.


아빠는 파김치를, 언니는 마당에서 가지를 따 길게 잘라 부침가루 묻힌 가지전을 이야기했다. 뭐야, 가지전? 난 먹어본 적 없는데? 할머니! 나는 가지전 안 먹어 봤어! 할머니를 더 귀찮게 굴걸, 할머니를 더 찾아뵐걸. 그럼 마당의, 뒤뜰의, 장날의 재료에 따라, 할머니의 기분에 따라 그 귀한 손맛을 한 번이라도 더 맛볼 수 있었을 텐데. 


어떤 상황을 기억하기에 가장 강력한 수단이 '음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음식도 못지않게 강력하다.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이 들어가던 동치미(입으로 따라 들어오는 파 건더기를 이빨로 밀어내며 먹다가 혼나곤 했다), 푹 지진 고구마순김치, 조기구이(조기구이는 항상 전용 플라스틱 그릇에 나와야 한다), 모든 재료가 흐물흐물 흩어질 정도로 푹 고아 끓인 찌개. 


이 모든 사랑이 담긴 음식들이, 할머니가 남기고 간 손맛이, 평생 혀끝에 남아 있을 테니 나는 평생 할머니와 함께할 수 있는 거, 맞지? 


사진만 찍지 말고 고구마순 다듬어라
숭덩숭덩 자른 수박으로 끝나진 않았지. 참외며, 포도며, 그 모든 것을 먹어야 끝났지...
버스 타고 할머니를 보러 가던 마을버스 안. 이것이 k-파마다.
할머니가 해준 팥죽은 아니지만, 삼거리에 함께 먹으러 간 팥죽. 할머니는 설탕, 소금을 한 숟가락씩 크게 크게 넣어 먹었다.
손에 쫀득하게 묻어나던 개떡.
마당에서 따온 가지와 방울토마토
고추와 방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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