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흔적은 다양한 모습으로 남았다
60년 평생 정읍에 있으면서 할머니는 항상 작은 이부자리를 두어 개 겹쳐 깔아 두고 작은 몸을 뉘어 잠을 청하시곤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5년이 지나고, 주변 친구들이 하나둘 먼저 세상을 떠날 때도 항상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이부자리를 펴고 잠드셔야 했다. 그 후 정신과 몸이 더 노쇄해질 수 없을 만큼 안 좋아지고 나서야 큰삼촌이 사는 원주로 가게 되며, 93년 인생 생전 써 보시지 않던 '침대 생활'을 시작했다. 할머니가 푹신한 침대를 좋아하며 곧잘 적응했다고 전화 너머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집 안에서 지내는 고양이 두 마리를 거침없이 쓰다듬어 고양이들이 슬쩍 도망 다니는데, 그래도 할머니라는 것을 아는 것인지 할머니가 만지면 물지는 않는다고 했다.
원주에 처음 방문했을 때, 할머니가 쓰고 있다는 침대를 보고 나는 빵 터져 버렸다. 두 다리 뻗고 두 팔도 생애 첫 침대를 온전히 향유하고 계신 줄 알았더니, 이게 웬걸? 할머니 몸집보다 큰 두 마리의 곰돌이가 침대 양옆으로 세팅되어 있었다.
외숙모에게 물으니, 침대 생활을 처음 하는 할머니가 혹여나 침대에서 떨어지실까 봐 양 옆에 곰돌이를 끼워 넣어주었더니 할머니가 든든하고 좋다며 까르르 웃으셨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싱글 사이즈 침대도 30kg대의 왜소해진 체격의 할머니가 눕기에 너무 컸다. 할머니 발 밑에는 고양이들이 자기 집이라도 된다는 듯 자리를 잡고 누워 있었다. 밥도 1인분을 온전히 드시지 않던 할머니는 주무시는 침대마저 곰인형 두 마리, 그리고 고양이 두 마리와 나눠 쓰게 됐다.
몽글몽글하고 따뜻한 것들에 밀려 새우잠을 청하듯 몸을 작게 말아 누워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의외로 떠오른 것은 '원적외선 싸구려 마사지기'였다.
몇 년 전, 할머니는 대뜸 '허리 마시지기를 사주라'라고 이모 삼촌들에게 시위한 적 있다. (요구보다는 시위에 가까웠다.) 할머니는 '홍보관 사람들'을 좋아했다. 홍보관은 임시로 사업장을 열어 3~6개월 정도 노년층을 상대로 영업을 하다, 폭리에 가까운 이율을 취하고 나면 또다시 자리를 옮기는 '메뚜기형' 유통업 형태다. 홍보관 사람들을 한 번도 본 적은 없는데, 할머니에게 듣기로는 차를 태워 오가게 도와주고, 노래도 불러주고, 두 손 맞잡고 이야기도 나눈다고 하니, '그래, 크게 사기는 치지 마라' 정도로 속으로 생각했다.
할머니가 평소 얼마나 크고 작은 돈을 홍보관 사람들 손에 쥐어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일은 할머니 주머니에 있는 돈보다 더 큰돈을 줘야 살 수 있는 가격의 물건이 등장하며 발생했다. 동네 사람들, 그러니까 할머니 친구 분들이 그 물건을 하나둘 사준 모양이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나만 안 사줄 수는 없지' 하고 , 대뜸 판매하는 물건 중에서도 가장 비싼 물건을 통 크게 사줘야겠다고 으름장을 놓기 시작한 것이다. 이모들이 더 좋은 마시지기를 사주겠다고 암만 이야기해도 '아이고 내 팔자야. 내가 이런 것도 못 사냐'는 식으로 당신의 팔자를 운운하며 우는 시늉을 했고, 결국 이기지 못한 이모 삼촌들은 돈을 조금씩 모아 홍보관의 싸구려 허리 마사지기를 구매해 주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할머니가 350만 원을 홍보관 사람들 손에 쥐어주어는 기쁨을 구매했다. 어떠한 마사지 기능도 없는, 옥돌 같은 밋밋한 돌들이 깔린 바닥에는 까만색 망사 그물이 촘촘히 박혀 있었고, 동그란 터널 같이 생긴 통에만 들어가 누워 있으면 의심스러운 빨간 불빛이 나왔다. 온도가 높아지는 흔한 기능도 없었다. 하지만 홍보관 사람들은 이 빛 아래만 누워 있으면 허리도 낫고 관절염도 낫고 골다공증도 낫는다는 말로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유혹했다.
문제는 허리 마사지기의 크기였다. 할머니댁 거실 절반이 넘는 거대한 크기였다. 할머니는 마치 그 사용성을 증명하겠다는 듯, 홍보관 사람들의 무해함을 보여주겠다는 듯 꼭 그 터널에 들어가 누워 계셨다. 그런데 그것도 두어 번, 몸을 돌리지도 못하는 좁은 터널에 오랜 시간 누워 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우리들의 러닝머신, 사이클 머신이 그러하듯이 허리 마사지기 위에는 옷가지가 쌓여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끝끝내 허리 마사지기의 창고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거대한 터널을 옆에 두고 다리도 뻗지 못하고 새우잠을 청하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잘 구슬리며 창고에 넣자고 이야기해도 할머니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할머니가 원주로 떠나고 난 이후에야, 빨간 원적외선(인지 그냥 빨간 플라스틱을 뚫고 나오는 빛인지 매우 의심되는 싸구려 색깔의 빨간빛)이 나오는 허리 마사지기는 그제야 창고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동안 350만 원짜리 엉터리 허리 마시지기는 내 눈에 골칫덩어리였다. 그런데 머리맡의 사랑스러운 곰돌이 인형을 보는데 왜 애물단지 허리 마사지기가 떠올랐을까.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잠시 먼저 가게 된 이제야, 그 빨간 원적외선 터널 마사지기가 달리 보인다. 할머니에게는 원적외선 엉터리 허리 마사지가, 곰돌이만큼이나 사랑스러운, 누군가가 할머니 곁에 있다는 사랑의 흔적은 아니었을까. 적막만이 가득한 외딴 시골집에, 그만큼의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하지 않았을까. 홍보관 사람들이 사기를 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날 하루 손 마주 잡고 이야기할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기꺼이 속아주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할머니는 떠났지만 사랑의 흔적은 다양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