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명원 May 10. 2024

초보의 야심

                                   

수업이 끝난 것은 오후 2시였다. 오전 9시에 모여 그림에 맞는 색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니 꼬박 다섯 시간을 보낸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불꽃처럼 열정을 활활 태우며 몰두하는 그림 수강생들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삼 분의 일은 수다를, 그리고 삼 분의 일쯤은 먹느라 바빴고, 나머지 삼 분의 일만 몰두해서 그렸다고 해야 맞겠다.      


배우고 싶다면 재능기부로 민화를 가르쳐주신다는 모임 회원분 말씀에 처음엔 선뜻 나서질 못했다. 그림이라면 재주가 메주인 사람이 나인지라, 하고 싶지만,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명을 듣다 보니 민화라는 건 내가 생각한 그림의 영역과는 같은 듯 달랐다. 우선 스케치부터 시작하는 창작의 영역이라기보다는, 본이 있어서 그것에 색칠해서 채우는 채색의 성격이 더 짙다는 걸 알았다.

물론 본뜬 그림에 색칠하는 것이 전부일 리는 없다. 같은 본으로 그림을 그려도 저마다 다른 이유는 각자 물감의 조합이 같지 않아서, 그리고 설령 같은 물감을 쓰더라도 붓질이 달라서 같은 것이 나올 수가 없었다. 민화 역시 창작이며, 그림인 것이다.     


적어도 스케치하는 창작의 작업은 아니라 다행이지만, 사실 색을 조합하는 일부터 이것 역시 창작이다. 우리는 아직 자신 있게 색을 만들지 못한다. 노랑과 파랑을 섞어 초록을 만든다는 것 정도는 알지만, 어느 만큼의 농도와 채도를 맞추는가는 여전히 어렵다.

게다가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은 요즘 원데이클래스에서 주로 쓴다는 튜브에 든 민화용 물감을 쓰지 않으신다. 정말 정석대로 먹을 갈고, 분채를 써서 색을 조합한다. 

“좀더요?”

“이 정도면 될까요?”

우리는 한 번도 자신 있게 ‘이 색이다!’ 해본 적이 없다. 늘 선생님께 확인하고 답을 들어야 그 다음 단계로 나갈 수가 있다. 사실 초보가 용기 내지 못하는 것은 색을 만드는 것뿐 아니다.      


어느 날 내가 그리는 부채를 보고 남편이 회사에 몇 개 가져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림엔 의욕이 앞서고, 소질은 없는 나처럼, 남편 역시 그림 보는 눈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라 부창부수이다. 그저 부채에 그림을 직접 그린 것만 신기해하며 나가서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래에...?”

알면서도 나는 부채 몇 개를 달라는 남편의 말에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했다. 그런데 그린 민화 부채를 어깨 으쓱하며 내어주고 싶다가도, 너무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칠고 투박한 붓질이 다 드러나는데 부끄러운 밑천을 보이는 것만 같아 부채를 꺼내기 망설여졌다.     


이렇듯 제대로 색을 만들지도 못하고, 남 앞에 과감하게 내어놓을 용기도 부족하지만, 다행히 의욕은 넘쳐나는 것이 초보들의 요즘이다. 작년부터 주로 그린 건 넓적한 평 부채다. 옛 그림에 보면 마을 어귀 정자에 앉은 할아버지들이 슬슬 부채를 부치는 장면이 많다. 그런 넓적한 부채에 물고기, 모란, 연꽃 등을 그렸다. 

“가지고 다니면서 부치기엔 역시 접이부채가 좋지 않겠어요?”

이렇게 말하며 이제 우리는 작은 판넬과 접이부채에 도전하고 있다. 말로는 ‘내보이기 부끄럽고 민망하다’라고 하면서도 우리는 새로 시작한 접이부채에 진심이다. 여름이 오면 뜨거운 태양 아래, 어느 가로수 그늘 밑에서 접이부채를 척, 펴들고 설렁설렁 부채질하는 어느 날을 상상하는 것이다. 누군가 옆에서 ‘어머! 부채가 정말 멋있어요. 직접 그리신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 아주 대수롭지 않은 듯 적당한 겸손과 적당한 자부심을 섞은 웃음을 날려야지. 아, 표정을 좀 연습해야 하나.


“우리 아예 가내수공업으로 나서볼까 봐요. 이 부채랑 판넬, 어디 플리마켓에 내다 팔까요?”

“하나에 만 원은 받아야 할 것 같아요.”

“당근은 어때요?”     


손은 붓질을 멈추지 않으며, 동시에 입은 간식을 먹느라, 아무 말 대잔치를 하느라 더 바쁘다. 한쪽에서 이야기하면 다른 쪽에서 맞장구치면서 깔깔댄다. 영락없는 여고생들 미술 시간 분위기다. 물론 돈벌이로 내다 팔자는 농담을 하는 걸 보면 결코 여고생들일 수는 없지만, 뭐 어떤가? 마음은 그렇다는 이야기다. 오늘도 이처럼 의욕과 물욕, 그리고 야심가득한 아무말 대잔치가 함께 하는 초보들의 즐거운 민화 수업이었다.     

이전 06화 늘임표를 연주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