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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Jul 09. 2023

이제 그만 착해도 될까요?

착한 딸, 착한 엄마

 다닥다닥, 작은 상점들이 붙어 서 있다. 거리는 좁고 지나는 사람들은 많아서, 오며 가며 어깨를 부딪기 일쑤였다. 연말 같은 새해였다. 가게마다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들로 쓸쓸하고, 나는 길 한가운데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두리번거리는 내게 써니가 다가왔다. “여서 뭐 하냐? 가자~” 어린 시절 할머니가 옛다, 받아라, 하고 던져주는 다디단 곶감처럼, 툭 던지는 말투가 눈물이 핑 돌도록 반가웠다. 어디로 가냐고 물었더니 요즘 서울에서 유행하는 사주카페에 가보자고 했다.

      

“삼재였네. 인제 거의 끝났어.”

“맞죠? 야가 그럴 아가 아닌데...”

그 보라는 듯, 의기양양하게 나를 보는 써니의 표정에, 나는 조금 안도하는 마음이 된다.

“올해까지도 쪼끔 힘들 수 있는데, 뭐 괜찮아. 원래 잘 참잖아?”

사주를 봐주는 분은 동그랗게 커진 내 눈을 바라보며 또 한 마디를 보탠다.

“이 사람 사주가 원래, 착하고, 착하고, 착해. 가끔 욱! 해서 탈이지.”

‘가끔 욱!’하는 나는, 써니와 마주 보고 웃었다. 배가 아프도록.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맨날 학교와 집만 오가느라 부산 지리도 잘 모르는 내가, 노량진 고시원에서 또다시 일 년을 버티기 위해 서울로 상경한 참이었다.      


대학 졸업 후 임용고시에서 미끄러지고, 사립 공업고등학교기간제로 들어갔다. 호르몬 분비가 한참 왕성한 때의 남자아이들로 가득한 교실에서는 얼굴 붉힐 일도, 도망치듯 뒤돌아 나와 구석에서 울 일도 많았지만, 잘 버텨냈다. 내 인생의 첫 교직 경험이었으니까, 하나하나 소중한 배움이라고 생각하면서, 참고 또 참았다. 결국 그곳을 박차고 나온 이유는, 정규직 채용을 빌미로, 은근히 뒷돈을 요구하는 제안을 받고서였다. 더럽고 치사해서 내가 그만두고 말지, 말은 그랬지만, 글쎄, 집에 그럴만한 여윳돈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써니는 여고 시절부터 함께한, 몇 명 안 되는 내 절친이다. 고등학교 때는 짝사랑하는 선생님께 말도 못 꺼내는 내 등을 떠밀어 선생님과 함께 깜짝 생일 파티를 열어주었다. 대학 때 우린 첫 연애를 함께 공유했고, 내 실연 소식에 가장 마음 아파하고 함께 울어준, 날 버린 그놈에게 실컷 욕을 퍼부어준 친구도 써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외롭고 힘든 시기에, 써니는 나를 위로하려고 사주카페에 데려갔다. 그곳에서 ‘착하고, 착한’ 사주를 타고났다고 들었을 때,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말해주었어야 했을까? 나는 세상 예민하고 까칠한 사람이 되고 말겠다고 결심했어야 하는 걸까?     


 고시원에서의 일 년은 긴 장마처럼 어둡고 무거웠지만, 장마 끝에 햇살이 반짝 나오듯, 나는 드디어 임용을 통과했다. 신규 발령을 받은 낯선 도시에 방을 구했다. 고향에서 가족들을 떠나와 외로웠던 탓인지, 써니의 이른 결혼과 출산을 지켜보며 괜한 조급증을 느낀 탓인지, 이듬해 결혼을 했다. 곧이어 첫 아이를 낳았다. 누구나 그렇듯이, 그 후로는 정신없이 살았다. 좋은 엄마, 좋은 선생님이고 싶었다. 둘 다 잘 해내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정도인지 몰랐는데, 박샘은 진짜 착한 것 같아요.” 동료 교사들의 그 말이 칭찬인 줄 알았다. 나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던 것인데, 그래서 다른 이의 의견에 따를 때가 많았던 것인데, 그들은 나를 향해 착하다고 했다.

 “선생님, 선생님은 다른 샘들하고 다르잖아요. 착하시잖아요.” 물러터져서, 남한테 매운 소리를 잘 못하는 내 성격을, 아이들은 금세 간파했고, ‘샘은 착하니까...’라는 핑계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곤 했다.

 가끔 남편이 엄한 소리로 속을 뒤집어 놓을 때면, “내가 미쳤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남자를 믿고,,,” 라며 홀로 자책하는 밤도 많았다. ‘착하고, 착한’ 사람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며, 참고 또 참으며, 오랜 시간이 흘러갔다.     


결혼 후 허리, 어깨 등이 자주 아팠다. 정형외과에서 약도 먹고 물리치료도 받았지만 큰 효과가 없어 한의원을 찾았다.

“화병이 있으시네요.”

“네?”

“가슴에 울화가 차 있으니까 자꾸 숨이 가쁘고, 소화도 잘 안되고, 몸 전체 순환까지 안 되는 거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스트레스를 덜 받도록 해야죠. 무리하지 마시고 잘 먹고 잘 자고, 푹 쉬시고요.”

누가 그걸 모르나, 누가 스트레스를 받고 싶어서 받나, 누가 무리를 하고 싶어서 하나. 투덜투덜 혼자 중얼거리며, 쓰고 비싼 한약을 들이켰던 날들도 많았다.     


 나는 늘 착한 딸, 착한 아이였다. 정말 타고나기를 ‘착하게’ 태어난 걸까? 잘못 끼워진 첫 단추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가족이 다 함께 산에 올랐던 장면이 떠올랐다.

 부모님은 농담처럼,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고, 자꾸 말 안 듣고 동생이랑 사이좋게 지내지 않으면 다시 다리 밑에 버리러 가야겠다고 했다. 그 순간의 그 말이 내게 준 두려움의 감각이 긴 시간을 가로질러, 내 마음 어딘가에 화상자국처럼 남아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그 후에도 친척 어른들이 무심히 던진 말들, 동생은 아빠, 엄마를 많이 닮았는데 너는 별로 닮은 데가 없다며, 다리 밑에서 주워 온 거 맞나 보다며, 장난처럼 던진 돌이 어린 내게는, 버려지는 일에 대한 깊고 깊은 두려움으로 작용해 온 것은 아닐까?     


내 돈 주고 산 물건을 반품하러 갈 때조차 점원에게 미안해하고, 누군가의 초대를 거절하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어렵고, 다른 이에게 싫은 소리를 못 해 혼자 끙끙대며 살아온 내 지난 삶의 시작은 그때부터였을까?     


나도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고 싶다. 혼자서 참고 또 참다가 화병에 걸리거나, 욱! 하는 대신, 내 몸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분출시키는 연습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깨진 유리처럼 날카로운 분노를 갈고 갈아 뭉툭하게 만드느라 애쓰지 않기로 한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어물쩍 넘어가지 않기로 한다.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에 상처 입을 때는, 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분노를 혼자 삭이며 불씨를 꺼뜨리기 위해 인내하지 않기로 한다. 이제는.


나 아닌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나에게 최면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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