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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Oct 09. 2023

예고 없이 비가 내리면

여성, 노동자로 살아가는 일

매년 학기 초에는 가정환경조사서를 받곤 했다.

아버지 직업란은 망설임이 없었다. 엄마는? 잠시 생각하다가 주부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 시절에는 다들 그랬다. 간혹 일하는 엄마를 둔 친구도 있었지만, 대부분 아버지는 밖에서 바쁘게 일하고, 엄마는 집안 살림을 돌보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보고 자란 환경이 그랬으니, 나의 장래 희망은 당연히 현모양처였다. 위인전이나 동화책에서도, 티브이 드라마에서도,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가족에게 봉사하는 여성들이 칭송받았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노력하면, 어느 날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나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될 거라는 이야기들이 넘쳐났다.     


엄마는 내가 ‘선생님’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

여자 직업으로는 최고라고, 엄마처럼 집에서 살림만 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당당히 직업을 가진 여성이 되라고 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서 돈도 벌고, 무엇보다 현모양처가 되기에 그보다 좋은 직업이 없다고 했다. 그 시절 학교에서 내가 만나는 선생님들은 뭔가 다가가기 어렵고 멋져 보였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교실에서는 최고의 권력자이기도 했다. 그렇게 내 장래 희망란이 교사로 바뀌었다.     


“선생님도 자식 낳아 키워 보세요. 자식이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지.”

표독스럽게 쏘아붙이는 그녀의 말에 분통이 치밀었지만 참아야 했다. 나는 이 년 차, 애송이 교사였다. 반 아이들 여럿의 코를 비틀어 당겨서 상처를 내고는, 불러서 이야기하면 그저 장난이었다며, 나한테만 뭐라 하냐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아이가 있었다. 겨우 중학교 1학년이었다. 남자 친구랑 백일인 기념이라며, 반 아이들 모두에게 백 원씩 걷어간 사실이 밝혀져 선도위원회가 열린 참이었다. 담임교사의 의견을 묻는 시간에, 나는 그 아이를 선도할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첫 학교에서부터 나는 삐걱거렸다.     


“애가 아프다고 월요일 아침에 갑자기 휴가를 쓰면 어쩌자는 거야? 하필 임신 중에 학교를 옮겨서는, 기껏 비담임으로 배려까지 해줬더니 말이야.”

교장에게 불려 가서 폭언을 들었다. 첫째를 친정에 맡겨 놓고 둘째까지 임신한 몸으로 학교를 옮긴 상황이었다. 주말에 아이가 고열에 시달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다급히 휴가를 낸 것이, 정말 내가 비난받아야 할 이유였을까? 빠진 수업은 다른 날로 교환해서 나중에 다 메꾸었다. 그런데도 항변 한번 못한 내가, 두고두고 후회스럽다.     


임산부라고 배려해 줘서 배정된 부서가 학생부였다. 당시에는 하루 종일 욕설이 난무하고, 체벌이 자행되는 공간이었다. 나는 각종 위원회를 소집하는 전화를 돌리고, 회의 내용을 서류로 작성해서 결재를 맡으러 교감실로, 교장실로 뛰어다녔다. 점점 불러오는 배를 안고, 이른 아침부터 교문 지도를 했다. 그리고 틈틈이 수업 준비를 했다. 동 교과 교사의 사정으로 보강까지 들어가다가 하혈을 했던 날은 너무 힘들고 서러워서 엉엉 울었다. 꿈꾸던 직업을 가졌고 엄마도 되었는데, 그중 한 가지도 제대로 해내기가 버거웠다.     


둘째 출산 후 돌아간 학교에서는 담임을 맡았다. 갓난아이는 집 근처 돌봐 줄 아주머니를 구해서 맡기고, 큰아이는 어린이집에 들여보내고, 허겁지겁 달려간 출근길. 당시에는 아침마다 교무 회의가 있었고, 지각이 잦아지자 교감이 나를 불렀다. 자꾸 이렇게 늦으면 곤란하다고, 주의하라고, 거기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그 반 성적이 꼴찌라고, 옆 반 선생님 본 좀 받으라고, 비교하는 말로 아프게 했다. 그런 시절이었다. 반 아이들이 공부를 못하는 것도, 학부모 총회 날 참여 인원수가 적은 것도, 담임의 능력 부족이라며 개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예고도 없이 비가 내렸고, 나는 자주, 피할 곳을 찾지 못했다.     


아군이 없었다. 잘못된 학교 규칙에 대해 아이들 편에서 의견을 제시하면, 기득권에 대한 반항으로 받아들여졌다. 아이의 거짓말과 일탈을 또 다른 거짓말로 덮으려는 학부모들과 대립하면, 민원 사항을 만들지 말라며 오히려 압박이 가해졌다. 아이들의 꿈과 도전을 응원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으나, 작은 지적이나 미미한 감점에도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아이들 앞에서 작아졌다. 자식의 허물을 가리는 일에만 급급한 학부모와, 그런 그들을 방조하는 학교 시스템에서 나는 서서히 체념과 타협에 익숙해졌다.     


시간이 흘러, 내게도 20년 넘게 경력이 쌓였다. 내가 출산과 육아를 거쳤던 때보다는 제도적인 뒷받침이 늘어났다. 후배들은 오전에 육아시간을 쓰고 한두 시간 늦게 출근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아빠와 엄마가 골고루 육아휴직을 쓸 수 있으며, 휴직 기간에 경제적인 지원도 늘었다. 뭣보다, 할 말은 하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줄 아는 후배들의 모습에 감탄할 때가 많았다. 비겁했던 나와는 달리, 용기 있는 그들의 모습에 남몰래 박수를 보내곤 했다. 그런데, 그 일이 벌어졌다.     


한 젊은 교사의 죽음. 한참 의욕 넘치고 선생님으로서 펼치고 싶은 꿈이 많았을 새내기 교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세밀한 정황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듣지 않아도 머릿속에 충분히 그려져서, 그래서 더 안타깝고 미안하다. 지금껏 내가 교직에서 맞닥뜨렸던 몇몇 상황들 앞에서 포기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좀 더 용기 내서 계속 싸웠다면 어땠을까? 고인 물처럼 썩어가는 학교 시스템에 조금은 각성이 되지 않았을까? 선배 교사로서 미미한 도움이라도 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불구경만 한 건 아닌지, 밀려드는 부채감에 젖어들었다.     


『김용균, 김용균 들』(권미정, 림보, 희음 지음)에서 ‘죽어도 사건이 되지 않는 죽음도 있으며, 죽지 않으면 사건조차 되지 못하는 일도 허다하다.’ (p.51)는 문장에 유독 오래 머물렀다. 서이초 교사의 장례식장에서 한 아버지가, 본인의 딸도 똑같이 죽었다며 울부짖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났다. 조직의 문제를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고 서둘러 은폐하려 했기 때문이리라. 얼마나 많은 비극 앞에서, 알면서도 모르는 척, 순간순간을 모면하면서 살아내고 있었는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님을 잊고 있었는지.          


커다란 돌덩이 하나 올려진 듯, 무거운 슬픔. 나는 여전히 사람들 앞에 나설 용기는 없지만, 뜨거운 여름에도 거리에 모인 그들의 걸음걸음에 응원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빗속을 응시하면서, 내 앞에 주어진 작은 돌멩이 하나부터 덜어 내 보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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