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것 아닌 사람이 되어도 되다니.
눈에 띄지 않는, 무던한 사람이 되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전엔 눈에 띄었냐고? 그렇다. 잘하고 싶었고 센터가 되고 싶었거나 센터여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심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젠장 인정하기 싫지만 관종이었다. 잘하는 사람이 이라는 의무가 있었다.
퇴사 후 백수는 생활비가 걱정이 되었다. 지인을 통해 한 기관의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로 근무하게 되었다. 이전에 나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이다. 24시간 자소서 쓰고 영어 공부해도 모자랄 판에 그게 무슨! 하지만 나는 취준생이 벼슬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고시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1분 1초를 공부에 넣어야겠지만) 어차피 이전 회사를 다니면서도 이직을 준비해야 했다면 이렇게 지냈을 테니까. 별생각 없이 들어가서 별생각 없이 다니고 있다.
처음에는 낯설었고 민망했다. 이제는 하루하루가 신기하다. 나에게 이런 점이 있었구나 싶었다. 이 말을 적기 부끄럽지만, 나는 눈에 띄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된 게 처음이었다. 계약직 사무보조원은 일도 많이 없고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먼저 끼어들 수도 없고 의견을 제시하기도 애매하며, 혼자 밥을 먹어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대화를 할 때도 나에게 주어진 상황이나 비중에 맞게 하게 된다. 상대방의 말을 대부분 듣고, 반응을 하고, 물어본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려고 하지 않는다. 무던하게 공기처럼 묻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의외로, 내가 그런 걸 잘하는구나, 하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늘 눈에 띄었다. 뭐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위치에 비해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늘 앞선 게 원인이었다. 똑 부러지게 말하고, 늘 열정을 가졌다. 누군가는 주제넘는다고 하고 누군가는 잘할 줄 알았는데 아직 신입이어서 의아해하기도 했다.
남들만큼 하는 걸 넘어 남들보다 잘하고 싶었다. 내가 중심이 안 될 수도 있음을 몰랐다. 늘 프로젝트를 리딩하고, 100점을 받고, 똑 부러지고, 또래와 달리 성숙한 사람이고 싶었다. 그건 나에게 악몽이었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는데 나는 처음부터 너무 잘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에 맞는 기대에 부응하다가 고장이 났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이런 느낌의 사람이 되어보기도 하는구나. 나는 별 것 아닌 사람이고 그런 사람인게 당연하다. 다들 예의 바르게 밥을 먹고 인사는 하지만,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나를 취급(?)을 하는 게 느껴진다. 기분이 좋진 않지만 딱히 나쁘지도 않다. 아무도 나를 궁금해하지 않고 더 잘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게 당연하다. 인류에게 있어서 나란 사람은 그냥 중요하지 않은, 한 사람일 뿐이다.
어쩌다가 나는 중요하고 멋진 사람이었어야 했더라. 언제부터 늘 똑 부러지고 눈에 띄고 1등이어야 했더라. 강압적으로 1등을 강조한 부모님의 탓도 있고 내 태생적 성향도 있으리라. 지금 와서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남들 보기에 좋게 짧은 시간에 대기업 취업을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모두가 대단하다고, 우러러볼 필요도 없었다. 난 정말, 별 것 아닌걸.
하지만 별 게 되기 위해 지금 이 단계를 지나고 있지. 어디서는 중요한 사람이고 어디서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니까. 지금은 그렇지 않은 시간일 뿐이다.
주인공 병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내 인생에서야 주인공이긴 하고, 최대한 스스로 기분 좋게 살아가려고는 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까지 많은 부담을 가질 정도의 사람은 아니지 않을까? 책임져야 할 일들은 있지만, 그렇게까지 잘 되어야 하는 걸까? 보란 듯이? 누구 보란 듯이?
그러다가 취업 준비를 하는 지금이 보였다. 나보다 더한 스펙을 가진 사람들도 서류에서 탈락하고 있다. 어쩌면 내년까지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 숱한 회사를 거쳤음에도 허무할 정도로 대기업을 못 가는 늦깎이 신입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나는 늘 남들보다 잘해야 했고, 심지어 늦기까지 했으니 더욱더 잘해야만 했다. 그러려면 거기에 다른 노력과 희생도 필요한데 그건 또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은, 올해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에 집중하려고 한다. 노력이라는 놈의 한계를 체력이 있는 20대 후반에 해보겠다. 결과가 좋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냥 한 사람 몫의 일자리만 있으면 된다.
어디서부터든 시작할 수 있는 자유로운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