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이 가장 심했던 20대 초반, 그때는 몸이 아프다고 착각했다. 그래서 계속 누워있었지만 회복되지 않았고 곰팡이가 피던 방의 상태조차 눈치채지 못하며 숨만 쉬었다.
깡
시간이 지난 지금, '무력감'이었음을 안다. 문을 열거나 옷을 정리하는 것조차 내가 할 수 없다는,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 뭔 헛소린가 하겠지만 우울이 심해지면 그 무엇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사람에 따라 할 수 없다, 인지 할 자격이 없다, 인지는 다르겠지만.
아무튼.
퇴사 직전에 나는 완벽히 그때로 돌아가 있었다. 당신의 우울증이 외부 요인에 의한 것이든 내부 요인에 의한 것이든 다들 비슷한 양상을 띨 것이다. 만약 잠자리에서 화장실까지 가는 몇 걸음 동안 옷이 발에 치인다면. 걔네를 치울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마 무력감에 빠져 있을 확률이 크다. 그래서 나는 아래와 같은 시도들은 제안한다.
첫 번째, 몇 시에 일어나든 일어나면 이불을 개라.
이렇다하더라도
차곡차곡 안 개어도 된다. 그냥 펼쳐놓고 이불 올려놓아도 된다. 그걸로 스스로에게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의식을 치러라.
뭐, 자기 계발서에 나오는 것처럼
"자, 오늘 하루도 시작해 볼까!" 라든가 미래에 대한 확언을 하면...
좋겠지만. 우리는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다. 이 더러운 인생이 끝나지 않고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급급하다. 그러니까 괜한 욕심내지 말고 침대나 정리하자.
두 번째, 신발장을 정리하자.
생각 정리도 같이하면 좋다.
퇴사했을 때 내가 한두 명 때문에 정신이 힘들었기 때문인지 신발장이 엉망이었다. 정말 아무 신발이 다 어질러져 있었다. 그래서 다시 신발을 정리했다. 그냥 짝을 맞춰서 줄을 지었고 5분도 안 걸린다. 당신의 취미가 신발 100개 사고 나이키조던 한정판을 모으는 거라고 해도 신발장 안에 넣는 신발 외 밖에 두는 것들은 4,5개뿐일 테다. 당신이 집에 들어오고 나가는 그 모든 순간을 구분시켜 준다.
우울증 혹은 무력함에 빠진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과 공간의 분리이다. 서울의 좁은 집에서 혼자 산다면 가능한 집 근처 카페나 편의점이라도 가길 추천한다. 집에서 나간 순간, 어떠한 활동이 시작됨을 스스로가 알아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그래서 신발장을 정리하면, 집을 나갈 때 외출이라는 실감이 난다.
세 번째, 택배는 가능한 바로 뜯어라.
택배를 시켜놓고 쌓아놓고 나중에 언박싱을 해야 하는 하울 영상을 찍는 유튜버가 아니라면 가능한 바로 뜯어라. 상자 뜯자마자 정리하면 베스트지만 아니라면 일단 물건을 꺼내놓고 바로 두어라. 명심해라. 작은 거 먼저 해야 한다. 우린 지금 많은 일들 한꺼번에 "이럇차"하는 귀여운 각오로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다. 쌓인 일과 쓰레기를 보면 다시 기분이 내핵으로 처박히는 상태다.
실패!
그니까 당신이 감당할 수 있을 때 해라.
지금 택배 왔으면 바로 뜯어라. 그걸 위해 칼이나 가위는 손에 닿는 곳에 두자.
네 번째, 식사 메뉴는 미리 정해두어라.
뭐 먹을지 정하는 것조차 힘들다면, 저녁이나 점심에 먹을 것들을 정해놓자. 그리고 생각하지 말고 그 시간에 밥을 먹어라. 나는 냉동 도시락을 여러 개 사서 얼려놓고 바로 데워먹었다. 아니면 셰이크를 사서 입맛 없을 때는 적당히 타서 먹었다. 물론 몸에 안 좋다.
가능한 직접 만들어먹는 것을 추천하지만. 만약 요리를 할 정도로 회복되었다면 카레나 볶음밥을 날을 잡아놓고 많이 해놓아라.
많이 하시면 저도 줘요.
그리고 소분해서 얼려놓으시길.
다섯 번째, 이제 옷을 치우자.
옷을 가장 마지막에 언급한 이유는, 가장 까다로우면서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옷을 관리하기도 어렵거니와 옷을 치운다고 셔츠나 반팔 모두 구겨서 안 보이는 곳에 둘 수도 없다. 옷차림이 주는 기분이나 타인의 반응을 무시할 수도 없다.
이러고 다녀도 되지만 회사에 가긴 좀 그렇잖아요. 내가 천제 개발자면 이해해주겠지만.
옷을 치울 때 무선 이어폰이나 뭐 대충 귀에 꽂는 걸 꽂아라. 1시간 정도의 플레이리스트나 팟캐스트, 유튜브 라디오 등을 추천한다. 그리고 아래 단계를 거친다.
1. 흩트러진 옷을 보며 하의는 왼쪽, 상의는 오른쪽에 둔다.
2. 그중 셔츠나 재킷/ 반팔이나 후드를 나눈다.
3. 하의도 운동복과 대충 입는 바지/ 청바지나 슬랙스로 나눈다.
4. 눈치챘겠지만 밖에서 '나름 신경 써서 입어야 할 옷'과 '대충 편의점 가거나 간단하게 입을 옷'을 나눈 것이다.
5. 간단하게 입을 옷은 어딘가에 걸어놓아라. 바로 손에 잡고 입을 수 입게.
6. 신경 써서 입어야 할 옷은 옷장 옷걸이에 걸어놓아라. 언제 입더라도 빳빳하거나 잘 관리될 수 있게.
이 과정에서 빨래도 하면 베스트이긴 하다.
뭐 대충, 요정도?
뭐가 이리 많어
누군가에게는 엥 이렇게까지 하나하나 해야 한다고? 하겠지만. 그건 건강할 때의 이야기이다. 나는 무언가가 해결되거나 회복된 후에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마음이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릴 순 없다. 뭐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주변 환경이 나아지면 마음도 생각도 나아진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할 만한 일로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