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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l Mar 14. 2024

언니의 언어에는 죽음이 있어,

너는 무슨 그런 말을 지코바 먹다가 하니.

언니의 언어에는 죽음이 있어.


룸메와 밥을 먹다가 뿜었다. 넌 애가 무슨 표현이 항상 그렇게 시적이냐. 그냥 쓴 글 가지고 그런 감상평이라니. 내 예전 브런치 글을 본 룸메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냐, 진짜 뭐랄까... 죽음의 기운이 있다니까? 그리고 바로 자연스럽게 화제가 전환이 되었다.


쫄았다. 들켰나? 나는 한때, 그리고 지금까지 자주 죽음을 향해 달려가곤 한다. 자의든 타의든 알 수 없는 세상의 흐름이든 지금까지 죽음을 실패했기 때문에 아직 살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삶에 회의를 느낀 사람이 모두 죽음을 시도하진 않는다. 살고 싶지 않아 진 사람만이 죽음을 시도하는 것도 아니다.

나의 경우, 모든 게 정해져 있고 더 이상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라 확신하여서 죽음으로 달려갔다. 의도치 않은 병이 있던 적도 있고 죽을 만큼 누군가가 괴롭힌 적도 있다. 그냥 살아있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다 나를 싫어하고 어딜 가던 나를 죽이러 드는 어른이 있다. 내 노력은 늘 배신당한다. 삶의 나락까지 갈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해서 목숨을 부지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시작한 게 브런치였다. 그러니 이 브런치를 우연히 본 친구는 자연스레 죽음을 떠올릴 수밖에. 심지어 평소에 글과 책과 시, 노래 등 메시지에 예리한 녀석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다시 살고 있다. 처음에는 나를 괴롭히고 마음대로 나를 정의한 가해자들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20대 중반과 후반을 쏟아부었다. 그러려면 뭐 사회적 성공을 해야 했는데, 그건 너무나도 변수가 많았다.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입결이 상대적으로 낮은 대학을 졸업한 사람보다 취직이 잘 되는 건 아니었다. 열심히 했지만 정말 안 맞는 일로 인해서 회사를 나올 수도 있었다. 나보다 열심히, 잘하는 사람은 늘 있었다. 그것을 버티는 것조차도 숨이 막힐 지경인데 의무처럼, 보란 듯이 하려고 했으니 늘 수족관 안에서 발버둥 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걸 모두가 구경하는 느낌이었다.

그래, 나는 자의식 과잉이 겁나 심하다. 내가 뭐라도 된 듯이 살아왔다. 실제 나는 아무 조건을 따지지 않고는 당장 뭐라도 월 200은 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르바이트 개념이겠지. 하지만 나는 남들이 뭐라 하건 지금은 그래도, 몇 년은 다닐 수 있고 개발될 수 있는 직무와 방향이 맞길 바란다. 무조건 좋은 회사라기보다는 그래도 내가 오래 다닐 수 있기만 하면 된다. 그조차도 불가능한 시기란 것은 안다. 그래서 제한시간이 있다.


삶은 항상 자기 맘대로 어떻게든 흘러간다고 해서 놓아버리면 최악의 경우로 흐름을 보았다. 하지만 하루하루 충실하면 또 나쁘지 않게 뭔가 흘러갔다. 하루하루 충실하는 것조차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이 사회와 세상에서, 지금보다 다른 좋은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함은 얼마나 큰 부담이 드는지. 그럼에도 살아있기에 그 부담감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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