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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선아 Aug 25. 2015

출근길 스케치 #10

75번 그녀

상암동에 있는 회사에 다니던 시절.

7시 50분에 75번 버스를 타야만 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아침 7시 50분.

그럼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 역시 일 출근하는 삶이니까.

처음 그녀를 눈여겨 본 것은, 그녀가 매일 아침 읽는 책 때문이었다.

어린이책을 많이 보는 직업상, 그녀의 무릎 위에 놓인 책 제목에 항상 눈이 갔다.

그녀는 꾸벅꾸벅 조는 날이 많았지만, '소년탐정 홈즈'라는 책 제목을 보자, 그녀에게 관심이 갔다.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일까? 나처럼 어린이책을 만드시나? 어린이책을 좋아하시나?

그녀의 아침 책 목록. '작은 아씨들'과 '넬슨 만델라'

나는 무심한 듯 지나치면서 그녀가 꾸벅꾸벅 졸 때, 그녀 무릎 위에 놓인 책 제목을 확인했다.



그녀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항상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는 매점으로 달려가는데,

매일 그런 것은 아니고, 한 번씩 가는 거였다.

뭘 사는 거지? 궁금했다.

껌? 사탕? 담배? 신문?

궁금해서 걸음을 늦추고 싶었지만,

1분이 급한 출근 시간인지라, 미스테리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어느날, 그녀와 말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비가 많이 오는 날, 그녀가 우산을 안 가지고 온 것이다.

나는 우산을 씌워주었고, 겸사겸사 나의 궁금증을 물어보았다.

-애들 책을 좋아하시나봐요?

-네?

-제가 그쪽 일을 해서요.

-아, 그거 그냥 조카들 책이에요.

침묵....

빗소리 때문에 우스운 대화가 묻혀졌기 때문일지,

르는 이와의 만남은 항상 설레기 때문일지 몰랐지만, 우리는 제법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있는 니네 집에 살고 있었, 너무 책을 안본다 싶어서 들고다니는 뿐이라고 했다. 요컨대 그녀는 어린이책과는 거리가 먼 직종의 일을 하고 있었다. 한 회사의 재무팀에서 수입과 지출, 돈의 흐름을 관장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그녀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숫자가 가득한 표를 띄운 컴퓨터 앞에 앉은 그녀를 떠올렸다.

남자친구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 

 오래   회사를 다니네요? 그러게나 말이에.  자주   같아. 세월이 진짜 라요. 금세 일주일이 간다니까요?  그런 대화를 나누다가 

-, ! 매점에서 뭔가를 사시는 걸 자주 봤어요.

-아, 그거요? 로또요.

-아...

-일주일 중 꿈이 좋은 날 로또 하나를 사요. 그리고 일요일 밤 11시에 확인을 해요.

-아...

-그러고 너무 출근하기 싫지만, 가야되구나! 하고 잠이 들죠.

나는 공감이 되어,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그녀가 밝게 말했다.

-그래도 저 오천원짜리는 몇 번 됐어요!


하루 하루 출근을 했다.

끼니를 먹고, 잠을 잤다. 그녀로 치면, 로또를 사는 날과 결과를 보고 실망하는 날이 반복됐다.

점심 시간에 식당을 찾아가는 길에, 횡단보도에서 나는 그녀를 마주치고 놀란 적이 있다.

그녀는 아침의 얼굴과는 상당히 다른 상태였다. 식당이 있는 쪽이 아니라, 하늘공원 쪽으로 허우적허우적 걸어가는 그녀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태를 도망치듯 건너가는 것 같았다. 나는 말을 걸 수 없었다.


5월 어느날, 나는 이직을 결심했고, 마지막으로 출근하는 날이 다가왔다.

그녀에게 나는 두 번째로 말을 걸었다. 마지막 날이라고 하자, 그녀가 수고하셨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로또를 사겠다고 하자, 그녀가 한 장을 사주었다.

그녀가 복권판매소 노파에게 말했다.

-이 분 오늘 특별한 날이에!

우리는 웃으며 헤어졌다.

그녀는 오늘도 75번을 타고 출근하고 있을 것 같다.

또는 회사를 그만지 않았다면, 일요일 밤 11시에 숫자를 확인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숫자가 가득한 컴퓨터 앞에 앉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녀, 로또에 첨이 되었을 수도 있다.

당첨이 되면, 그녀는 1년 정도 걸리는 크루즈 여행을 할 거라고 했다. 그까짓 거 1억 정도면 된다고.

혼자 가지는 않을 거고, 남자친구는 없으니까, 친구를 한 명 데려갈 거라고 했다.

그녀가 명랑하게 웃던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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