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전 날 촬영되어 밤 사이 편집실로 전달된 촬영본을 정리 중이던 어느 날 아침. 한창 일하던 귀로 두 동료가 복도에서 나누는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영화 쪽에서 일할 때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뭔지 알아? 같은 걸 일 년 동안 계속 보고 보고 또 봐야 한다는 거야."
"맞아. 정말 그걸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
의사들은 공부를 하며 자신의 전공을 정합니다. 외과, 내과, 피부과, 안과 등등. 요리도 마찬가지이죠. 한식, 중식, 양식 등. 편집도 이런 부분이 어느 정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 든요.
영화 vs TV
영화 편집이든 TV 드라마 편집이든 아무런 제약 없이 어느 쪽이나 할 수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양 쪽의 시스템이 조금씩 다른 탓에 서로 상대 쪽에서 넘어오는 사람을 쉽사리 믿지 못하는 경향이 있죠. 심한 경우엔 거의 초보자 취급을 하기도 합니다. 경력 단절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소 억울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죠. 미드 <브레이킹 배드 Breaking Bad>로 에미상을 수상한 에디터인 켈리 딕슨도 첫 영화 편집에 들어가기 전에 그런 취급을 받았다고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에미상을 수상하고도 ‘너 영화 편집할 수 있겠어?’라는 의심의 눈길을 받을 수 있다니. 십여 년 전쯤, 2-3년 동안의 경력을 무시하고 신입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말을 들었던 어느 광고 편집 회사에서의 면접이 떠오릅니다.
아직 학생이던 시절 어느 선배와 영화와 TV의 선호도에 대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선배는 TV 드라마를 주로 하는 에디터인데, 마침 당시 영화를 한 편 끝내고 난 참이어서 그에게 영화와 TV 중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지 물었습니다.
"난 TV가 훨씬 좋아. 솔직히 얘기해서 나쁜 씬은 아무리 계속 노력해도 어느 이상 좋아지지 않잖아? 그런데, 영화 편집을 하게 되면 그런 신을 붙잡고 어떻게든 길을 찾기 위해서 오랫동안 끙끙대야 하는데, 난 그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 재미도 없고, 힘들기만 하지.
그런데, TV는 어떻지? 물론, 스케줄이 빠듯하지. 하지만, 쉴 새 없어 새로운 재료들이 공급되잖아. 지겨울 새가 없는 거지. 같은 촬영본을 몇 달 동안 계속 볼 일도 없고. 항상 새로운 걸 가지고 일할 수 있으니 얼마나 재미있어?"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땐 속으로 ‘그런 유치한 이유라니…’하고 생각했습니다. 겨우 한 신을 더욱 잘 만들기 위해 보내는 시간이 지겨워서라니. 이때만 해도 TV보다는 영화에 애정이 훨씬 많았고, 어쩌면 TV를 살짝 무시하는 정도일지도 몰랐으니 당연한 반응이었죠. 빠른 스케줄 속에서 기계처럼 작업하는 게 분명하다고, 아직 TV에서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 섣불리 단정 짓고 있었습니다. 부끄러워지네요. 변명을 하자면, 몸으로 더 겪기도 전에 이런 생각을 했던 데엔 우리나라에서 일했던 경험도 한몫을 했습니다. 짧게는 하룻밤 안에 편집을 끝내야 하는 일도 있었을 정도로 타이트한 스케줄 속에서 일을 했고, 그런 스케줄 속에서 ‘기계’가 되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말하고 보니, 구차한 변명이네요.
편집은 편집이다
TV 드라마의 경우, 프로덕션 기간을 포함해 TV에선 대충 한 달에 에피소드 하나 정도를 끝냅니다. 갈수록 에피소드 숫자도 다양해지고, 플랫폼도 다양해지며 작품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대부분 이와 비슷한 스케줄이죠. 이렇게 빠듯한 일정으로 일을 하다 보니,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마치 공장에서 상품을 찍어내듯이 기계적으로 일을 하게 되는 가능성이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시간에 쫓기다 보니 좀 더 좋아질 수 있는 편집을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마무리할 수도 있는 것이죠.
급박한 스케줄의 TV에 비해 영화는 한 작품을 하는데 좀 더 시간을 할애합니다. 몇 개월은 기본이고, 장편 애니메이션의 경우엔 몇 년도 걸리죠. 한 프레임 한 프레임 다듬고, 이 쇼트에서 다음 쇼트로 넘어가는 것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을 더 갖습니다. 신과 신의 구성, 연결을 어떻게 하면 좀 더 효과적일 수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할 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이 더 주어집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TV 드라마 편집을 할 때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물리적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것이 드라마던 영화던 편집을 위한 고민의 내용은 똑같습니다. 그리고, 그 고민을 향한 치열함 역시입니다. TV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좋은 작품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냥 대충 만들어져 나오는 것 같으신가요?
일을 처음 시작할 땐 다음 작품은 영화로 하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좋은 작품이라면 어디든 상관없다는 입장입니다. 이는 제가 이 안에 들어와서 직접 몸으로 더 부딪히면서 TV 편집은 영화 편집보다 더 하찮다는 생각이 근거 없는 편견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