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 오기 전 한국에서도 편집일을 했습니다. 연예 기획사, 예고편 제작사, 케이블 채널 방송국 등 여러 회사를 거쳤습니다. 회사의 소속으로 일할 때도 있었고, 프리랜서로 일할 때도 있었죠. 다만, 고용 형태가 어떠했는지에 관계없이 장편 애니메이션 편집을 했던 일 년 반의 시간을 제외하면, 다루어야 했던 영상은 언제나 같았습니다. TV 드라마나 영화의 예고 혹은 뮤직비디오였죠.
이때 일이 재미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늘 마음 한편엔 본편 편집을 하고 싶다는 바람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지금 미국에 와서 그때 바라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드라마엔 많은 경우 2회부터는 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이전 회에서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지 짧게 요약하여 보여주는 '이전 이야기'가 붙습니다. 오늘 볼 에피소드에서 벌어질 이야기를 보기 전, 이전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보여줌으로써 오늘의 이야기를 좀 더 이해하기 편하고 풍성하게 해 주기 위함이죠. 한국에서 일할 때 KBS 드라마인 <아이리스>와 관련하여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에도 각 회마다 '이전 이야기'가 붙고, 한 회씩 걸러가면서 끝에 '다음 이야기'가 붙었죠. 이 두 가지를 편집하는 일을 맡았었는데, 늘 짧은 시간과의 싸움으로 밤샘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곳의 드라마들도 많은 경우 '이전 이야기'가 매 회 첫 시작에 붙습니다. 현재 참여 중인 작품 <로즈웰 Roswell, New Mexico>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을 편집하는 게 제 업무 중 하나이죠. 한국을 떠나면서 예고 편집은 더 이상 하지 않겠노라 마음속으로 생각했는데... 물론, '이전 이야기'가 '예고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누구라도 이 둘을 비교해보면 금세 알 수 있듯이, 둘의 구성이나 목적은 사뭇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이야기'는 단순히 지난 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이번 회에서 일어날 일이 시청자에게 더 효과적으로 다가올 수 있도록 그 밑바탕을 깔아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제가 알아서 편집을 시작할 수도 있지만, 각 에피소드를 집필한 작가에게 '이전 이야기'에서 어떤 것들이 다뤄지면 좋을지 문의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습니다. 자, 이번 에피소드에서 네가 쓴 이야기를 보다 효과적으로 만들려면 지난 회에서 일어난 일들 중 뭘 넣어주는 게 좋을 거 같아?라고 말이죠. 게다가, 그렇게 하면 백지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니 제 고생도 덜 수 있습니다. 일석이조...라고 할 수 있으려나요?
물론, 이렇게 해서 작가들이 보내준 내용을 모두 40여 초의 시간에 집어넣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전 이야기'는 대체로 30초에서 1분 사이이고, 이번 작품의 경우엔 45초가량이 목표입니다. 작가들이 원하는 내용을 모두 넣다 보면 1분은 훌쩍 넘어가는 게 일쑤이죠. 따라서, 그들이 보내 준 내용을 바탕으로 취사선택하여 효과적으로 구성하는 게 중요하게 됩니다. 글로 써진 것을 실제 영상으로 편집했을 땐 언제나 다른 것을 보게 되죠.
이전 이야기를 편집하는 것은 좀 귀찮은 일입니다. 비록 길이는 짧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전성을 갖춰야 하는 게 이전 이야기이죠. 이어서 볼 본 이야기의 예고편인 셈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일정 속에서 이를 편집하는 것은 그리 녹록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전 이야기 편집은 어시스턴트 에디터에겐 자신의 편집 능력을 함께 일하는 에디터와 프로듀서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어시스턴트 에디터는 에디터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에디터가 되기 위해서는 내 편집 실력이 이 정도라는 증거가 필요하죠. 제가 에디터를 고용하는 입장이더라도, 제가 믿는 누군가 그를 보증하거나, 그가 편집한 것을 제가 본 적이 있어야만 고용할 수 있을 터입니다. 드라마에서 어시스턴트 에디터는 주로 사운드 작업과 임시 VFX 작업이 주로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편집한 이전 이야기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한 시간 드라마 기준으로 미드는 일반적으로 편집팀이 세 명의 에디터와 세 명의 어시스턴트 에디터로 구성됩니다. 그리고, 한 명의 에디터와 한 명의 어시스턴트가 하나의 페어가 되어서 담당 에피소드를 작업하는 형태입니다. 어시스턴트 에디터는 이렇게 자신과 페어를 이루는 에디터와 가장 많은 접촉을 하게 되죠. 그런데, 이전 이야기를 편집할 땐 작가, 그리고 쇼러너와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작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작가들에게서 메일이 왔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내용을 모두 모아 봅니다. 역시. 1분 30여 초에 다다르네요. 이걸 또 어떻게 줄일까... 뭐, 어쨌든 시작이 반이니, 반은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