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이 흐름을 만든다
한 달에 한 권, 일 년에 열두 권 ― 리딩코리아 독서캠페인
― 한 권의 책이 흐름을 만든다
책은 혼자 읽지만, 그 여운은 한 사람에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전해지고, 또 다른 누군가의 하루를 바꿉니다. 그 잔잔한 파문이 모여 하나의 흐름이 될 때, 그것이 곧 문화가 됩니다. 리딩코리아는 바로 그 믿음에서 출발했습니다.
‘한 달에 한 권, 일 년에 열두 권.’
이 문장은 독서를 의무처럼 강요하는 구호가 아니라, 꾸준히 좋은 책을 찾아 읽고, 또 누군가에게 권하고 싶다는 마음을 담은 약속이었습니다.
리딩코리아 기획 초기, 우리나라 성인의 연평균 독서율이 40% 대라는 통계를 보았습니다. 더 놀라운 건, 충북이 전국에서 가장 낮은 독서율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죠.
열 명 가운데 여섯 명이 일 년에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 현실.
이유를 물으면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답했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하지만 사실 그것은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계기가 없었던 것이죠. 책을 읽고 싶게 만들어주는 흐름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책을 읽고 싶게 만들 수 있을까?”
그 물음이 리딩코리아 프로젝트의 첫 페이지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캐나다 CBC의 <Canada Reads>를 모델로 삼았습니다.
다섯 권의 후보 도서를 두고 토론 배틀을 벌여 ‘올해의 책’ 한 권을 선정하는 방식이었죠.
하지만 정재승 교수, 이권우 평론가와 회의를 거치며 결론은 달라졌습니다.
“이 시대에는 책을 경쟁적으로 읽는 것보다,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회복시키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정재승 교수의 그 한마디가 방향을 바꿔놓았습니다. 그래서 리딩코리아는 독서의 ‘경쟁‘이 아니라 ’초대‘를 택했습니다.
“당신이 책을 읽고 싶을 때, 그 마음을 응원해주는 곳이 있다면 어떨까?”
경쟁보다 함께 읽기를, 성과보다 지속을, 강요보다 권유를.
그렇게 ‘한 달에 한 권, 일 년에 열두 권’ 리딩코리아가 시작되었습니다.
리딩코리아는 책을 권하는 방송, 책으로 연결되는 사람들, 그리고 책이 만들어내는 지속 가능한 문화의 리듬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한 사람의 읽는 습관이 공동체의 대화로 이어지고, 그 대화가 또 다른 독서의 불씨가 되는 선순환을 꿈꿨습니다.
리딩코리아를 시작하고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한강 작가를 만난 날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2022년 리딩코리아는 열두 권의 도서 중 하나로 『작별하지 않는다』를 선정했습니다. 충북교육도서관과 함께 북콘서트를 준비했지요.
도서관의 ‘사제동행 인문동아리’ 학생들이 『작별하지 않는다』를 함께 읽고, 기억과 존엄, 역사와 인간에 대해 토론을 이어갔습니다. 그 진심어린 활동을 한강 작가에게 전하며, 조심스레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작가는 청주의 무대에 직접 섰습니다.
그날의 공기는 달랐습니다.
우리는 마치 한강 작가의 작업실 안에 함께 앉아 있는 듯했습니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가 어떤 마음으로 쓰였는지, 그가 고통 속에서 어떻게 언어를 길어 올렸는지를 직접 들었습니다.
작가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 소설의 제목이 ‘작별하지 않는다’인 이유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의이자, 애도를 끝내지 않겠다는 다짐이에요.”
학생들은 “이 소설은 제주 4.3을 소재로 하였지만, 결국 본질은 지극한 사랑이었다.”고 말했고, 작가는 “끝까지 읽어서 이 사랑을 느껴줬다면 그게 저에게 가장 기쁜 일이에요.”라고 답했습니다.
그날, 문학은 더 이상 활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숨결이 되었습니다.
책이 사람을 만나고, 사람이 사랑으로 연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2022년부터 리딩코리아는 매년 열두 권의 책을 선정해 ‘한 달에 한 권, 일 년에 열두 권’이라는 흐름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선정도서는 라디오 프로그램마다 코너를 만들어 낭독했습니다. 해마다 선정되는 책의 주제는 달랐지만, 중심에는 늘 사람과 이야기, 그리고 연결이 있었지요.
이금희 아나운서, 정재승 교수, 이권우 평론가, 박혜진 문학평론가, 김겨울 작가, 노명우 교수, 가수 요조, 안광복 철학교사 등 한국의 대표적인 독서가들이 함께했습니다. 그들은 방송이라는 무대를 넘어, 책을 매개로 한 대화의 장을 열어주었지요. 라디오와 TV를 통해 전파된 이 토론은 다시 유튜브로 확산되며, 세대와 지역을 넘어 독서 네트워크를 만들어냈습니다. 유튜브 댓글에는 이런 목소리들이 이어졌습니다.
“이런 방송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책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너무 행복합니다.”
“공영방송이 해야 할 방송이죠. 기획자분께 박수를 보냅니다.”
그 목소리들을 들으며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책이 누군가의 손에 건네질 때마다, 그것은 단순한 콘텐츠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잇는 언어가 된다는 것을요.
리딩코리아는 단순한 독서 캠페인이 아니었습니다. 책을 매개로 한 공감의 네트워크이자, 지역과 세대를 잇는 문화의 리듬이었습니다. 처음엔 단순히 시민들의 독서율을 올려보자는 취지로 시작했지만, 리딩코리아 프로젝트를 통해 깨달은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습관은 혼자 만들기 어렵지만, 함께라면 가능합니다.
매달 한 권의 책을 두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거울이 될 수 있지요. 누군가의 감상이 나의 시선을 확장시키고, 나의 문장이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둘째, 문화는 큰 도시에서만 피어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청주의 라디오와 도서관, 그리고 시민들이 함께 만든 리딩코리아는 ‘지속적인 흐름’이 문화를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셋째, 책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언제나 새로운 무지를 마주합니다. 그래서 또 다른 책을 찾고, 다른 사람과 대화하게 되죠. 이 순환이 바로 문화의 생명력입니다.
리딩코리아를 통해 저는 확신했습니다.
책은 여전히 공동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이고, 그 변화는 누군가의 꾸준한 손끝에서, 그리고 함께 읽는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요.
이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올해 몇 권의 책을 읽었나요?
그중 단 한 권, 가장 마음에 남은 책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누구와 그 책 이야기를 나누고 있나요?
내일, 당신은 어떤 책의 첫 장을 펼치겠습니까?
그 책이 당신의 하루를, 그리고 우리의 문화를 새롭게 써 내려갈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