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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상 Apr 13. 2020

난 매일 밤 내일을 갉아먹는다

류시화 엮음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밤만 되면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겠다. 뭔가를 보고 싶어서 휴대폰을 들고 있는 건 아니었다. 볼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이 그저 방황한다. (디지털 유목민이란 말이 떠오르는군..!) 어쩌다 보면 2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다. 영화라도 한 편 볼걸.. 하며 시간을 아까워한다.


하루 종일 피곤하다가도 자리에 누우면 오늘 하루가 아쉽고, 난 아직 내일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 있다. 시계는 이미 내일인데 이 밤까지는 오늘이라고 우기면서 내일을 미룬다. 그렇게 난 매일 밤 내일을 갉아먹다가 잠든다.






자려고 눈을 감고 있으면 지나간 일들이 그렇게 떠오른다. 그것들이 내게 주는 감정은 후회와 창피함이다. 왜 그랬지.. 왜 그랬을까.. 안 그랬다면.. 밤만 되면 그렇다. 원래 밤은 아름다운데, 난 왜 맨날 내 과거 속에 갇혀 눈살을 찌푸리는지 모르겠다.


내 후회는 주로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다. 비슷한 시가 있어서 가져왔다.



그때 왜 (김남기)


저 사람은 거짓말을 너무 좋아해,

저 사람과는 결별해야겠어,

하고 결심했을 때

그때 왜,

나의 수많은 거짓말했던 모습들이 떠오르지 않았지?


저 사람은 남을 너무 미워해,

저 사람과는 헤어져야겠어,

하고 결심했을 때

그때 왜,

내가 수많은 사람을 미워했던 모습들이 떠오르지 않았지?


저 사람은 너무 교만해,

그러니까 저 사람과 그만 만나야지,

하고 결심했을 때

그때 왜,

나의 교만했던 모습들이 떠오르지 않았지?


저 사람은 너무 이해심이 없어,

그러니까 저 사람과 작별해야지,

하고 결심했을 때

그때 왜,

내가 남을 이해하지 못했던 모습들이 떠오르지 않았지?


이 사람은 이래서,

저 사람은 저래서 하며

모두 내 마음에서 떠나보냈는데

이젠 이곳에 나 홀로 남았네.



사실 밤마다 떠오르는 기억은 소수의 몇 사람과 관련된 일이다. 후회하고 후회하고, 창피하고 창피해도, 그 기억이 무뎌지려면 얼마나 많은 밤을 더 보내야 할지 가늠이 안된다. 모든 계절은 필요할 테니 올 해가 갈 때쯤은 괜찮았으면 좋겠다. 물론, 그 사이에 새로운 후회가 쌓이지 않는다면..


그러다 또 이 시를 보았다.



나의 시 (레너드 코헨)


이것은 내가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시

나는 그 시를 쓸 수 있는 유일한 시인

모든 게 엉망이었을 때도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

약물에 의존하려고도

가르침을 얻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잠을 자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시 쓰는 법을 배웠다.

바로 오늘 같은 밤

바로 나 같은 누군가가 읽을지도 모를

이런 시를 위해.



내게 시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 머릿속에 드는 생각을 그대로 내려놓고 싶었다. 그러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노트 앱을 켜서 그냥 썼다.



못 자겠고

못 놓겠다


불안하다

이 이후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눈살을 찌푸리다

잠들지


망설여진다

시계를 보고 싶지

않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시가 나를

구했다

이 밤으로부터

나로부터






시는 인간 영혼의 목소리라고 한다.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잠시 멈추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도 한다.

'삶을 멈추고 듣는 것'이 곧 시라고 한다.


매일 밤 내 영혼의 목소리를 자꾸 피하려고만 했는 것은 아닐까. 피할수록 쫓아오고, 피할수록 난 도망자 신세가 되어 있던 것 같다. 내가 내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고, 내 감정을 부정하느라 잠을 못 잤던 것 같다.


오늘 밤 난 어떤 사람인지 귀 기울여보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인용할 시는 스스로의 영혼을 '초대'하는 내용 같다.



초대 (오리아 마운틴 드리머)


당신이 생존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있고,

자신의 가슴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꿈을 간직하고 있는가 나는 알고 싶다.


당신이 몇 살인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나는 다만 당신이 사랑을 위해

진정으로 살아 있기 위해

주위로부터 비난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알고 싶다.


어떤 행성 주위를 당신이 돌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슬픔의 중심에 가닿은 적이 있는가

삶으로부터 배반당한 경험이 있는가

그래서 잔뜩 움츠러든 적이 있는가

또한 앞으로 받을 더 많은 상처 때문에

마음을 닫은 적이 있는가 알고 싶다.


나의 것이든 당신 자신의 것이든

당신이 기쁨과 함께할 수 있는가 나는 알고 싶다.

미친 듯이 춤출 수 있고, 그 환희로

손가락 끝과 발가락 끝까지 채울 수 있는가

당신 자신이나 나에게 조심하라고, 현실적이 되라고,

인간의 품위를 잃지 말라고

주의를 주지 않고서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당신의 이야기가 진실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자신에게는 진실할 수 있는가

배신했다는 주위의 비난을 견디더라도

자신의 영혼을 배신하지 않을 수 있는가 알고 싶다.


어떤 것이 예쁘지 않더라도 당신이

그것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가

그것이 거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더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가 나는 알고 싶다.


당신이 누구를 알고 있고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당신이 슬픔과 절망의 밤을 지샌 뒤

지치고 뼛속까지 멍든 밤이 지난 뒤

자리를 떨치고 일어날 수 있는가 알고 싶다.


나와 함께 불길의 한가운데 서 있어도

위축되지 않을 수 있는가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가더라도

내면으로부터 무엇이 당신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가


그리고 당신이 자기 자신과 홀로 있을 수 있는가

고독한 순간에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을

진정으로 좋아할 수 있는가 알고 싶다.






뭐 이렇게 좋은 시가 있단 말인가.

시 하나쯤 외우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오늘 밤 이 시를 외우다가 스르르 잠들길 바래본다. 여러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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