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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May 11. 2019

해적이 전해준 얘기

'해적룰렛 게임'이라는 보드게임이 있다. 작은 통에 해적이 들어가서 머리만 내놓고 있는 모양인데, 통을 빙 둘러 스무 개 정도 작은 구멍이 나란히 뚫려있다. 게임이 시작되면 참가자들이 번갈아가며 구멍에 플라스틱 칼을 하나씩 꽂아 넣는다. 그 구멍 중 하나는 해적과 스프링 장치로 연결이 되어있어, 그곳에 칼을 꽂으면 해적이 펑 튀어 오르도록 되어있다. 그게 어느 구멍인지 게임 참가자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이 이 게임의 묘미다.


해적을 튀어 오르게 만든 이는 그 게임에서 패자가 된다. 그래서, 칼을 하나씩 꽂을 때면 마치 러시안룰렛에서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듯한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연출된다. 그러다가 누군가에 의해 해적이 튀어나오면 나머지 참가자들은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쉰다. 다시 해적을 끼워 넣으면 연결 구조가 리셋되며 또 어느 구멍에 해적이 튀어 오를지 모르는 상황이 되고, 새로운 게임이 다시 시작된다. 

5000 후크룰렛 (아이샘)

딸이 어디선가 이 놀이 기구를 가지고 와서 둘이서 한참 게임하며 놀았다. 막상 게임을 해보니 별 것 아닌 게임 같은 데도 긴장감이 장난 아니다. 칼을 하나둘 번갈아 꽂을수록 다음 칼, 그다음 칼에 해적이 튕겨오를 확률이 높아지며 심장이 점점 두근거렸다. '이번에 꽂는 칼에 펑 튀어 오르면 어쩌나.' 해적이 잘 버티길 빌며 조심스레 칼을 꽂고, 꿈적 않는 해적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그러다 또 내 차례가 돌아오고, 다시 돌아오고... 밀려오는 긴장감에 칼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한참 그렇게 게임을 하다가, 딸이 "이제 해적을 튀어 오르게 만드는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해볼까?" 하며 제안했다. 어차피 둘이 하는 게임이니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승패 확률은 같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규칙을 바꾸니 칼을 꽂는 마음가짐이 확 바뀌었다. 이제는 게임하면서 더 이상 조마조마하거나 떨리지 않았다. '해적이 제발 펑하고 튀어 올랐으면.' 하는 기대감에 칼을 자신 있게 쿡쿡 꽂았다. 해적이 꿈적 않고 버티고 있으면 아쉬운 탄성으로 다음 차례를 기다렸고, 그러다가 혹시나 펑하고 튀어 오르면 "우와아~" 환호성을 질렀다. 기대감을 갖고 임하는 게임은 이전과 비교가 안 되도록 흥겨운 게임으로 바뀌었다.

삶을 대하는 마음가짐도 어쩌면 이와 통하지 않나 생각했다. 해적룰렛 게임 같은 상황은 살다 보면 우리 앞에 종종 나타나곤 한다. 시험이나 오디션, 중요한 발표, 면접, 건강 검진, 사랑 고백 같은 상황들... 보통 그런 일 앞에서는 룰렛 구멍에 칼을 꽂듯이 긴장하여 두근거리고, 마음은 걱정으로 가득 찬다.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져야할까? '해적이 펑 튀어나가면 어쩌나' 하며 걱정하는 마음일까, 아니면 '찌르다 보면 언젠가 펑 튀는 때가 있겠지. 빠르면 더 좋고' 하며 기대하는 마음일까.


로또를 사는 이는 추첨 날까지 1등 당첨을 기대하며 행복감을 느낀다. 당첨되지 않더라도 다음을 기약하며 기대를 이어가곤 한다. 우리는 이미 자궁에서 로또보다 훨씬 어려운 당첨 확률을 뚫고 세상에 태어났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일 대부분은 그보다는 훨씬 가능성이 높아서 충분히 기대할 만하다. 삶의 게임에서 칼을 꽂는다는 것은, 해적이 두렵지만 해야 는 의무일까, 해적이 튀어 오르는 행운을 얻을 수 있는 권리일까.


수많은 걱정은 무엇인가 꼭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비롯된다. 가족은 돌봐야 하고, 돈은 벌어야 하며, 해야 할 일들이 끝이 없다. 출근길에 문 밖을 나서면 해적이 들어있는 통이 줄지어 서있는 것 같다. 이제 게임의 방식을 좀 바꿔보면 어떨까?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마스크를 쓰는 것 조차 태어나서 나름 잘 살고 있어 가능한 권리다. 삶은 애초부터 누가 시켜서 해야 하는 의무가 아닌, 태어남으로써 누리는 권리였다.


'정신 승리'라는 말이 있다. 자기 합리화라며 폄하되는 말이기도 하지만, 현실의 어려움을 마음속으로 이겨내며 승화시키는 뿌듯함이 나는 좋다. 해적룰렛 게임에서 규칙을 바꾸고 즐거웠던 이유는 게임의 방식이 패자를 골라내는 것에서 승자를 정하는 것으로 바뀌어서 그랬다.


해적룰렛 게임에서 해적이 나에게 얘기해주었다. 삶은 네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상 패자란 없는 게임이라고. 그러니 작은 승리를 기대하며 항상 즐겁게 살아가라고. 나는 너를 위해 항상 튀어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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