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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Jul 17. 2020

여유야 뭐 하니

동네 버스 정류장에 안내 전광판이 있다. 곧 도착할 버스 번호가 뜨면서 버스 안에 승객이 얼마나 타고 있는지 세 단계로 알려준다. 여유-보통-혼잡.


른 아침 시간, 모든 버스의 상태는 '여유'로 표시되지만, 출근길 버스에 오르는 마음의 상태는 '혼잡'에 가깝다. 반면 퇴근길 버스는 무척 혼잡하더라도 마음'여유'롭다. 마음의 여유는 공간의 여유와 비례하지 않는다.

'여유롭다'는 말은 무엇인가 남아서 넉넉한 상태를 말할 때 쓴다. 남아서 넉넉한 것이 시간이거나 공간이거나, 물질이거나에 따라 그때그때 '여유'의 해석은 다르다. 서로 다른 '여유'들은 각각 혼잡, 긴장, 바쁨, 궁핍 같은 단어들을 반대말로 두고 있다. 그런 바라지 않는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어 다들 그렇게 여유를 찾기 원한다.


'여유를 찾는다'는 말은 '여유'가 어딘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음을 뜻다. 숨어있다가 술래가 '여기 있네!' 하고 찾아내면 머쓱하게 튀어나오는 숨바꼭질에서처럼, 여유는 몸을 움직여 여기저기 들추어볼 때 얻어지는 능동적 감정이다. 아무리 시간이 많거나 넓은 공간에 혼자만 있어,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사더라도 여유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호수에 떠 있는 백조의 여유로운 모습은 물아래의 수많은 발길질이 만들어낸다. 여유는 거만하게 '부리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찾는' 것이다.

맥심 커피믹스 CF, 동서식품

광고에'커피 한 잔의 여유'라는 카피를 만난다. 지켜보면 상황은 대개 둘 중의 하나다. 고상하거나, 아니면 고단하거나. 아침햇살 드는 창가에 예쁜 잔에 커피를 즐기거나, 상사에게 깨지고 휴게실 한편에서 동료와 캔커피를 들이켠다. 어느 경우든지 여유는 남는 것이 아니라 남기는 것이다. 분주한 아침 일과를 마쳤거나, 동료를 위로하는 마음을 찾으면 여유가 나온다. 나중에 타는 이를 위해 버스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가고, 시간을 쪼개 다른 이를 돕고, 돈을 아껴 의미 있는 일에 사용할 때도 숨어있던 여유가 나온다.

칸타타 콘트라베이스 CF, 롯데칠성음료

스포츠 중계에서 '여유 있게'라는 말을 듣는다. 축구에서 골키퍼를 제치고 여유 있게 골을 넣거나, 야구에서 잘 맞은 타구를 여유 있게 잡는 모습 같은 것. 여유는 위치를 빠르게 파악하여 빈 공간으로 열심히 달린 공격수나 타구 방향을 읽어 적절한 곳에 수비 위치를 잘 잡은 수비수가 찾아낸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여유 있게 달리려면 페달을 열심히 밟아야 한다. 여유 있게 결승점에 들어오는 마라톤 선수는 말할 것도 없다. 한가함여유로움은 아주 다른 것이라서 인스타그램 속 여유 있는 사진들 뒤편에는 백조의 수많은 발길질이 숨어있다.


어린 시절,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노래하며, 굳이 잠자고 있는 여우를 깨워 세수시키고 개구리 반찬에 밥을 먹이면서 여우의 생사를 확인했다. 여우뿐 아니라 여유도 우리 주위 곳곳에 잠자고 있다. 앞만 보고 달려서는 잘 보이지 않고, 그냥 앉아있다 해서 주어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가끔 '여유야 뭐하니' 하면서 이름을 불러가며 잘 있는지 찾아 한번 깨워볼 필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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