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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목수 Oct 29. 2022

사랑의 확장, 생산성

사람에게는 자기 혈육으로 세대를 있고자 하는 생식 본능이 있다. 생식 본능 이외에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다음 세대를 위해 기여하려는 욕구도 있다. 이는 자신이나 가족 범위를 넘어선 사랑의 확산이다. 에릭슨은 심리사회적 발달단계에서 장년기 사람들은 “생산성(generativity) 대 침체(stagnation)의 관문을 거친다고 봤다. 여기서 생산성이란 자신과 가족의 범위를 넘어 젊은이나 약자를 보살피려는 관심과 행동이다. 다른 사람들을 도우므로 자기 인생의 의미를 추구한다. 이태석 신부가 남수단에서 의료와 교육봉사로 양육했던 아이들이 의료인으로 성장하여 이 신부 대를 이어 동포들을 치료하는 자원이 된 것은 생산성의 좋은 예이다.  

 

에릭슨은 생산성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자아도취(self-absorption)를 제시하기도 했다. 자아도취의 영어 단어를 자기흡수로 직역할 수도 있는데 오히려 이 번역이 더 실감 난다. 탁월한 능력으로 성공한 사람들 중에는 자기 주변의 모든 기회와 자원을 흡수해버리고 남과 공유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 이들도 있다. 다수 고위공직에 임명받은 자가 자녀교육 핑계로 위장전입을 한 것은 좋은 교육기회를 편취하려는 자아도취의 예이다. 어떤 이는 퇴직 시 법인카드로 상품권을 대량 구입해 사적으로 챙기거나, 타던 관용차를 헐값으로 자기 소유로 만들기도 했다. 다행히 사회에는 자아도취와는 전혀 다른 동기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육개혁가 존 테일러 게토

존 테일러 게토는 코넬 대학교 졸업 후 뉴욕의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트로서 잘 나가고 있었다. 1964년 어느 날 그는 공립학교 선생이 되고 싶어 그 직장을 그만둔다는 말을 상사에게 했다. 상사는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 


 "자네 어머니를 만나면 말해주게. 머저리 하나를 키워내셨다고. 뉴욕에는 학교라는 것은 없어." (바보 이야기, 존 테일러 게토) 


과연 뉴욕에는 ‘학교’라는 것이 없는 듯했다. 지저분한 교실, 학교 당국자의 간섭, 아이들 이야기를 전혀 나누지 않는 교사들, 교사에게 걸상을 던지려는 학생들……. 어느 초등학교 3학년 열등반에서 밀라그로스라는 아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다시 광고계로 돌아갔을 거라 고백했다. 아이들 다수는 단어 몇 개만 이어져 있어도 더듬거리며 겨우 읽었는데, 밀라그라스는 글 한 편을 아무 실수 없이 읽었다. 이 조그만 여학생은 6학년인 오빠의 책도 다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밀라그로스를 우등반으로 옮겨야 된다고 말하자 교장은 게토에게 임시교사 신분에 교장을 귀찮게 하지 말라는 말로 대응했다. 결국 게토의 간청으로 교장은 밀라그로스를 직접 테스트했고, 아이는 우등반에 갈 수 있었다. 


이로부터 24년 후인 1988년, 존 게토는 신문에서 우연히 밀라그로스의 이름을 발견했다. 밀라그로스 말도나가 주 교육부로부터 우수 직업 교사상을 받은 것이다. 그녀는 1985년 맨해튼 구 ‘올해의 교사’로 선출된 바 있고, 1986년에는 전국 여성협의회에서 ‘양심의 여성상’에 지명된 바 있었다. 한 사람의 임시 교사가 최고의 교사 한 사람을 생산한 것이다. 존 테일러 게토 자신은 뉴욕시와 뉴욕주로부터 “올해의 교사상”을 여러 번 세 번 받을 만큼 훌륭한 교사로 인정받았다. 미국 공교육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하고 필요한 변화 방향을 제시하는 그의 책 중에는 “바보 만들기” “수상한 학교” 등 국내에서도 번역된 책들이 있다. 게토는 “홈스쿨링” 운동 등 학생 중심의 대안적 교육 확산에 큰 업적을 남겼다.  


황산을 가르친 정약용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1801년 그의 나이 마흔에 낯선 곳에 유배되었다. 그를 받아준 사람은 강진 동문 밖 주막 노파 밖에 없었다. 자기 두 아들을 직접 가르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유배지에서 중인들 아이를 가르쳤다. 


서울서 온 선비가 아전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소년 황산이 찾아왔다. 열다섯 살 황산이 다산에게 고백했다. (미쳐야 미친다, 정민)

"선생님, 제게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둔한 것이요, 둘째는 앞뒤가 꼭 막힌 것이요, 셋째, 답답한 것입니다."

다산이 대답했다.

"대저 둔한 데도 계속 천착하는 사람은 구멍이 넓게 되고, 막혔다가 뚫리면 그 흐름이 성대해진단다. 답답한데도 꾸준히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짝하게 된다. 천착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뚫는 것은 어찌하나? 부지런히 해야 한다. 네가 어떤 자세로 부지런히 해야 할까?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야 한다."

황상은 이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았다. 스승을 처음 만난 지 61년이 지난 임술년, 스승의 가르침을 처음 받던 날의 기억을 “임술기”란 글에서 밝히고 있다.

“스승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겨 감히 잃을까 염려하였다……비록 이룩한 것은 없다 하나, 구멍을 뚫고 막힌 것을 툭 터지게 함을 삼가 지켰다고 말할 만하니 또한 능히 마음을 확고히 다잡으라는 세 글자를 받들어 따랐을 뿐이다.” 


다산은 황산의 학업 성취도에 대해 흑산도에서 유배 중이던 그의 형 정약전에게 편지로 알렸고, 또 약전은 다산에게 자신의 평가 의견을 나누었다. 남의 집 아이를 가르치는 일에 형제가 이렇게 진지했다는 것이 놀랍다. 정약용은 1804년에는 어린 제자들을 위한 한자 교재 “아학편”을 짓기도 했다.


모두가 기다리는 사람, 우리 동네 떡볶이 아줌마


도종환 등이 엮은 책, “참 아름다운 당신”은 작가 주변 사람들이 생산성을 실천하는 모습을 그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 둘째 장의 제목은 “모두가 기다리는 사람, 우리 동네 떡볶이 아줌마”이다. 그녀는 어묵 국물을 권하면서 새댁 하소연을 들어주고, 맞벌이 부모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가 보이면 떡볶이 한 접시를 먹인다. 지나가는 공무원 시험 치는 총각에게는 격려 메시지를 던진다. 그녀 트럭에는 사춘기에 이른 다운증후군 아들이 앉아있다. 그녀 남편은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트럭 장사가 아이와 함께 하며 할 수 있는 것이어서 그녀는 감사한다. 힘들 때 누군가가 등 두드려주면서 “다 잘될 거야!”라고 한마디 해주길 바랬단다. 그녀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기로 하고 지나가는 이에게 말을 걸고 경청하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떡볶이 아줌마는 동네 사람들이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이런 보통 사람들의 생산성으로 세상은 살만하다. 우리는 게토처럼 영향력 있는 교육개혁가도 아니고 다산 같은 대학자도 아니지만, 우리 생업과 생활 활동에서 다양한 형태의 생산성을 이처럼 실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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