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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목수 Oct 29. 2022

밀러와 겐자부로의 선택

자기 아기가 심한 자폐, 다운증후군, 뇌 탈장 같은 장애를 지니고 태어났다는 사실보다 부모에게 절망스러운 일이 있을까? 아무리 잘 치료하고 애써 교육해도 그런 장애의 정도를 많이 줄이기는 어렵다. 인간애와 도덕성을 강조하던 이름난 작가들은 이런 딜레마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이십 세기 미국의 대표적 극작가 아서 밀러와 일본의 노벨상 수상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는 전혀 다른 행동 방식을 선택했다. 그에 따라 그들 인생이 전혀 다르게 평가되었다.   


아서 밀러

아서 밀러는 전후 미국의 대표적 극작가였다. 그의 퓰리처 수상작 “세일즈맨의 죽음”과 “시련” 등은 우리나라에서도 자주 공연되는 현대 희곡의 고전으로 꼽힌다. 밀러는 가속된 산업화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던 미국 사회에서 개인이 소외되고 도덕적 규범이 무너지는 상황을 주로 그렸다. 


밀러는 당시 미국 사회에 광풍처럼 몰아치던 매카시즘에 당당히 맞섰다. 1951년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가 공산주의자 색출 운동을 주도했다. 밀러는 친구이자 동료인 엘리아 카잔의 밀고로 ‘반미활동 조사 위원회”에 불려 나가 청문회에 섰다. 그는 주변 공산주의자 이름을 대라는 위원회 요구를 거부했다. 이후, 밀러는 17세기에 있었던 마녀재판 같은 일이 재현되는 현실을 풍자하는 작품 “시련”을 썼다. 그는 표현 자유와 억압받는 작가를 보호하는 단체인 국제 PEN클럽 회장을 역임했다.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적극 반대했다. 주요 사회 이슈가 생길 때마다 자기 목소리를 냈다. 지난 세기, “미국의 도덕주의자”로 불렸던 그의 개인적 삶은 공적인 행동과 얼마나 일치했을까? 


밀러는 메릴린 먼로와의 이혼 3개월 후 사진작가 잉게 모라스와 결혼했다. 그들 딸 레베카는 어릴 때부터 예쁘고 총명했다. 부부는 어느 모임이나 딸을 데리고 다니며 자랑했다. 레베카와 네 살 터울로 태어난 아들 다니엘은 다운증후군으로 진단받았다. 밀러는 생후 1주일 만에 다니엘을 장애인 수용 시설로 보내 버렸다. 그의 각본에서 맞지 않는 인물을 지워버리듯 다니엘 존재를 그의 인생에서 지워버렸다. 아내는 일요일마다 아들을 보러 갔으나 밀러는 한 번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의 자서전에서 다니엘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아내가 죽었을 때도 아들을 부르지 않았다. 사위 권유로 말년에 다니엘을 한번 찾았을 뿐이다. 


그는 죽기 직전 그의 유산 상속자 명단에 다니엘을 포함시켰다. 갑작스러운 유산 상속으로 다니엘은 더 이상 정부의 장애인 지원을 못 받게 되었다. 그간 받아온 지원금까지 지원을 정부에 되갚아야 했다. 전기작가 고트필러는 작품으로 보는 것과는 상반된 밀러의 인격을 “차가운 물고기” 같다고 평가했다. 


오에 겐자부로

일본인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에게 첫아들이 태어났을 때 의사는 ‘아기 뇌의 일부나 두개골 밖으로 나온 뇌 탈장으로 큰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젊은 아버지 겐자부로는 힘겨운 장애를 지고 세상에 나온 아기에게 빛이란 뜻을 가진 낱말, “히카리’로 이름 지어주었다. 히카리의 지능지수는 65에 불과했다. 눈물관이 없어 울 수 없고 의사소통을 거의 할 수 없었다. 시력은 0.03에 불과했고 원근을 구분할 수 없었다. 


사물에 대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하카리에게 부모는 토착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테이프로 반복해서 들려줬다. 하카리가 여섯 살이던 어느 날 휴양지에서 새소리가 들리자, 히카리는 문득 “이것은 흰 눈썹 뜸부기입니다”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테이프로 듣던 목소리를 따라 말한 것이었다. 그때 겐자부로 부부는 아들이 세상과 소통 가능함을 믿었다. 히카리는 음악에 더 집중력을 보였다. 하카리는 다행히 절대 음감을 지니고 있어 들었던 음악을 악보로 기록할 수 있었다. 열세 살부터 자기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동생 생일을 축하하는 곡을 만들었고 아버지 시에 곡을 붙이기도 했다. 겐자부로 주변 음악가들 도움으로 히카리의 음반을 발매했다. 히카리가 29살이던 1992년 발매한 첫 음반은 출시 3개월 만에 8만 장이 팔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2년 뒤 겐자부로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1994년에 발매한 두 번째 음반은 일본 클래식 음악 부문 1위에 올랐다. 


이런 기적을 보기까지 히카리 가족 역시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히카리를 밖에 데리고 나가자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냉대에 직면했다. 이웃들은 ‘장애인을 왜 공공장소에 데려왔나?’며 따졌다. 히카리가 12살 때에는 유괴당하여 도쿄역에 버려지기도 했다. 밀러와는 달리, 겐자부로는 아들의 장애를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사춘기 이후 간질 발작을 하는 아들을 전철로 학교에 데려 주고 데려왔다. 대중목욕탕에도 함께 갔다. 겐자부로는 해외여행 기간이 아니면 늘 한밤중까지 히카리 방 가까이 있는 식탁에서 글을 썼다. 매일 40년 이상을, 아들에게 담요 덮어주는 일로 하루 일과를 마감하며 살았다. 겐자부로 가족은 히카리의 장애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히카리의 남다르고 특별한 삶을 가족 중심에 두고 사랑을 집중했다.    


교육의 공정성

유학시절 교육철학 수업 중 교육 공정성에 관한 토론이 있었다. 뛰어난 학생에게 더 많은 학습기회와 자원을 주는 것이 공정한가, 장애자와 지진아 학습에 전체 학생 평균보다 더 투자하는 것이 타당한가 등이 주요 이슈였다. 건강한 사회는 약자와 공존할 때 가능하므로 약자가 뒤처지지 않게 더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강자독식 사회는 윤리적으로 건강할 수 없다. 강한 아이만 키웠던 국가 스파르타는 평화기에 타락하고 멸망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한 친구는 박사 과정을 마치면서 기를 쓰고 미국에 남으려 했다. 지체장애아로 태어난 둘째 아들이 정상적으로 살 수 있는 환경이 어딘가를 두고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당시 장애자 관련 인식이나 제도 지원에 있어 미국이 훨씬 더 나았다. 내 아들 딸이 건강하게 자란 것에 별로 감사하지 않았다. 겐자부로 인격을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가족 힘만으로 감당하기 힘든 장애아 양육을 개인적으로 돕진 못해도 제도적인 지원은 우리가 해야 한다. 이십일 세기 한국에서는 특수학교 설치를 반대하는 지역주민 앞에서 장애아 학부모들이 무릎 꿇게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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