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9일째. 나는 누구와 연애를 한 걸까?

전혀 다른 사람을 사랑한 건 아닐까

by 하마

상처 주지 않겠다는 약속을 무참히 깨버렸지만. 배도 나오고 키도 그리 크지 않았지만. 5년의 연애 끝에 다른 여자에게 못난이처럼 치근덕거림으로써 큰 배신감과 슬픔을 안겨줬지만.

그는 그래도 내가 5년 동안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잘못된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던 거라는 생각이 나를 가장 괴롭혔다. 헤어진 뒤에도 여전히 내 감정은 끝나지 않았기에, 그 불을 어서 꺼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다. 초반의 1-2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연애 기간 동안 거의 싸운 적이 없어서 갑작스러운 이별을 견디기가 더 힘들었다. 나에겐 이 이별은 그야말로 날벼락과도 같았다.


5년 동안의 연애는 거짓이었을까

자신을 배신할 것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즉 배신을 당한 사람들은 모두 상대가 그럴 줄 모르고 사랑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믿고 사랑했던 이별 전의 연인과, 결국은 배신을 저지르고 헤어진 뒤의 연인은 다른 사람인가? 이 간극을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계속 과거를 곱씹게 되고 그의 행동을 되짚어보게 된다. '내가 대체 누구를 사랑했던 걸까' 하는 생각 때문에.


외도를 저지른 당사자도 나만큼

책 <외도, 그 후>에서는 외도를 저지른 당사자도 외도가 발각된 이후 무척 당황스러워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 역시 아주 당황스러워하며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다. 지금 생각하면 변명이지만 그 당시에는 나도 그걸 믿었다. 그만큼 아니 그보다 더 당황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가 당황했다고 해서, 이별을 의도해서 바람을 피운 게 아니라고 해서 내가 그를 용서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나는 '바람을 피울 수도 있는 사람'과 연애를 한 것이다. 5년이나.


사랑했던 마음도 용서할 수 없는 마음도

이영도의 소설 <폴라리스 랩소디>에는 서로를 무척 사랑하지만 신체적인 문제로 인해 서로를 안을 수 없는 부부가 등장한다. 다른 주인공이 남편에게 '사랑하는 아내를 안지 못한다는 고통 때문에 사랑이 옅어지지 않느냐'라고 묻자 남편은 '사랑과 고통은 서로 길항작용을 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그 두 감정이 서로를 해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 그 두 가지 감정을 똑같이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하나를 위해 다른 것을 희생하지 않기로. 둘 다 정직한 저의 감정이고 그래서 둘 다 저에겐 소중한 겁니다. 전 영원히 이루미나를 사랑할 것이고, 그녀 때문에 겪는 고통 때문에 그 사랑이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두 가지의 감정이 충돌해서 괴로울 때마다 이 대목을 생각했다. 나의 경우에는 '영원히 사랑할 것'이라는 부분은 물론 빼야겠지만. 5년 동안 그를 열렬히 사랑했던 마음도, 이제 그를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어서 괴로운 마음도 둘 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 가지 마음 때문에 다른 마음을 없던 걸로 치거나 퇴색시키지 않기로. 이게 말처럼 참 쉽진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두 가지 마음 모두 내 안에 차곡차곡 담겨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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