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비혼입니다만
5년 사귄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워 헤어진 지 10일이 지났다. 혼자 여행도 다녀왔고 친구들과 술도 진탕 먹었고 이별 후 봐야 한다는 영화도 거진 다 본 상태. 헤어지고 일주일쯤 지나면 괜찮아지겠거니 했는데 오산이었다. 이별 1주 차는 충격과 공포라면 2주 차는 두근두근 스릴러와 같다. 조금 더 침착해지고 술이 세질 뿐 슬픔은 오히려 더 커졌다. 처음에는 친구들에게 바람피운 전 애인 욕을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헤어졌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조차 괴롭게 느껴졌다. 회사 사람들이 연애나 이별 얘기를 꺼낼까 봐 밥을 따로 먹고 싶고, 친구들이 나를 불쌍한 눈으로 볼까 봐 혼자 있고만 싶었다.
결혼을 했어야 했나?
라는 생각이 퍼뜩 든 순간, 스스로도 그 생각이 너무 어이없었다. 스물 후반에 만나 5년을 사귀고 서른 초반에 헤어졌으니 연애하는 내내 '결혼은 언제 하냐'는 질문을 얼마나 자주 받았는지 모른다. 나는 확고한 비혼이고, 전 애인은 아직 결혼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였다. 연애 극초반에 비혼에 대한 협의를 한 상태였고 그래서 5년의 연애 기간 동안 결혼은 우리 사이에서 한 번도 화두에 오른 적이 없었다.
헤어진 직후에 든 생각도 '다음에 만나는 사람과는 확 결혼이나 해버릴까'였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비혼으로 전 애인과 연애나 하며 살면 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별을 하고 나니 누군가와 오래 '연애만' 하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이가 들면 점점 남자친구를 구하기도 어려워질 텐데, 이렇게 갑작스레 헤어질 수도 있는 거라면 맘 편히 결혼을 해야 하는 건가?
만약 결혼을 했으면 달라졌을까?
1번. '유부남'이기 때문에 더욱 처신을 신중히 하여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
2번.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어차피 그럴 사람이기 때문에 바람은 똑같이 피운다. -> 다만 헤어지기가 더 복잡해진다.
만약 1번 결론이 가능한 사람이라면, '유부남'이라는 단어는 '여자친구가 있는 몸'으로도 당연히 바뀔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결혼 여부가 물리적인 정조대도 아니고. 결혼한 뒤 바람피우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즉 결혼을 하든 안 하든 바람을 피울 사람은 피운다는 건데 만약 결혼한 상태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지금 내가 그런 것처럼 그를 바로 쫓아내고 헤어지긴 힘들었을 것이다. 이사도 가야 하고 이혼 절차도 밟아야 하니까. 주변에 알리는 과정도 더 복잡하고 길어졌을 테고. 이 모든 걸 감안하고서라도 헤어질 문제인지에 대해 더 오래 고민했어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냥 사는 쪽을 택했을지도.
외도가 일어났을 때 결혼의 효용성이란
서로를 내려놓는 과정을 조금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라는 결론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이라도 했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떠오른 건 그만큼 절박하게 답을 찾고 싶어서였다. 만약 내가 정기적으로 그의 폰을 검사했다면. 좀 더 바람에 대한 나의 단호함을 자주 어필했다면. 결혼이라도 했더라면.
그가 바람을 피우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까?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을까?
상대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을
막는 방법이 과연 있을까?
알라딘의 지니가 들어줄 수 없는 소원은 죽은 이를 살리는 것, 그리고 타인이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다. 바람을 피운 전 애인이 나를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았는지, 시간이 지나며 사랑의 권태가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다. 둘 중 어떤 쪽이든 끝난 사랑을 이어 붙이는 일은 내가 마법의 램프를 찾아내도 불가능한 것이다.
지니가 와도 못 하는 걸 결혼식이 해결해주진 않았을 거라고, 내가 찾는 해답이라는 건 사실 없다고 믿는다.
오랜 연애가 끝난 뒤엔
다들 서둘러 결혼한다지
몇 년 동안 연애를 하다 헤어진 사람들이 다음 사람을 만나면 몇 달 만에 결혼한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다. 이젠 그 마음을 백번 이해할 수 있다. 결혼이 급해서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천만에. 그건 다시는 이런 공허함을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어떤 사람도 완전히 믿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연애를 계속하기에는 불신이 커졌고 혼자 지내기에는 공백이 너무나 크다. 그 공백을 메우기에 가장 적절한 방법은 아마도 결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혼주의자는 대체 무엇으로 이 공백과 허무함과 불신을 메워야 하는 걸까?
*표지 이미지 : <아름다운 어둠>_파비앵 벨만, 케라스코에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