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이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혼자 떠나는 실연 기념 여행지는 대구로 정했다. 대구의 불로동 고분군을 보러 갈 거야,라고 대구에 살았던 사람에게 얘기했더니 거기가 어디냐고 해서 괜히 뿌듯했다. 거기 살았던 사람조차 모르는 비밀의 무덤을 보러 갈 테다. 전국의 무덤을 산책하며 단상을 기록한 <대형무덤>이라는 책에서 고즈넉하고 좋았다는 내용을 보고 충동적으로 정했다. 거기 나오는 무덤을 보러 가라고 쓴 책이 아니었지만, 그냥 어디든 가고 싶었기에.
철저히 외로우려고 떠난 여행
일부러 혼자, 철저히 외로울 것 같은 장소를 택해 떠났다. 나도 참 진상이군,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표를 예매하고 숙소를 잡았다. 남들은 헤어지기 전에 아름답게 둘이서 이별 여행을 떠난다던데 왜 나는 혼자 굳이 실연 여행을 떠나는가. 왜 청승을 떠는가 싶었지만 내가 이런 사람인 걸 어떡하나. 어디든 집이 아닌 곳에서 혼자 주말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일단 대구행 기차 안에서는 좀 외롭기도 하고 눈물도 찔끔 났다. 그런데 도착하고 보니 생각보단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꽤나 재밌었다. 여행은 언제나 의외의 상황들이 생기기 때문에 즐거운 거지만.
기차에서 나를 울적하게 한 생각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막창의 성지 대구에 가는데 그 메뉴를 도저히 혼자 구워 먹을 순 없을 거고, 숙소에서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가면 좋지만 아마 내 상태로 봐서는 실연 얘기부터 꺼내게 될 텐데 그럼 아주 진상이 되겠지? 이번 여행에선 사람은 만나지 말자. 그럼 막창은? 못 먹는 거야? 누구를 데려올 걸 그랬나? 아 난 왜 이렇게 대책이 없지?'
대략 이런 생각이 줄줄이 들면서 그놈의 막창이 너무 먹고 싶어 속상할 지경이었다. 여전히 식욕이 없는 상태였는데도 막창만큼은, 대구에 왔으니 막창은 꼭 먹고 싶다는 나의 집념이 무서울 정도. 그러면서도 전 애인과 여행을 가면 집을 떠나는 순간부터 돌아오는 순간까지 얼마나 조잘대고 먹고 마시고 사진을 찍어댔는가가 떠오르면서 그에 비하면 무덤가와 같이 적막할 이번 여행이 벌써부터 슬퍼졌다.
200여 기의 고분이 나를 위로해주었다
기분이 바뀐 건 불로동 고분군에 도착해서였다. 대구가 생각보다 큰 도시여서 길치인 나는 한참이 걸려 고분군에 도착했는데, 주택가 사이로 뿅 하고 무덤 몇 개가 나타나서 좀 당황했다. 당연히 유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매표소도 안내소도 아무것도 없이 그냥 공사판처럼 폐가 옆에 고분이 있었다. 길도 딱히 없이 잔디가 넓게 깔려 있고 거기에 크고 작은 무덤이 뿅뿅뿅. 아 이게 고분군이군? 하면서 다섯 개 남짓 되는 고분 사이를 이리저리 걷고 있는데 눈 앞에 넓디넓은 언덕이 펼쳐졌다.
정보를 잘 안 찾아보고 여행을 떠나는 습성 덕분에, 이토록 많은 고분이 있는 넓은 장소인 줄은 전혀 몰랐다. 그래서 앞에 펼쳐진 수많은 고분군은 반전과도 같은 풍경이었다. 사람은 신기할 정도로 없었다. 무덤이 몇 개쯤 있고 어두컴컴한 박물관이나 있겠지 했는데 대프리카의 쨍쨍한 6월 햇살 아래에 파란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그 너른 들판에 기백 개의 무덤이 동글동글 솟아 있다니. 길도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아서 자유롭게 그 사이를 걷고 살짝 뛰고 앉고 서며 3~4시간을 놀았다.
그 찬란한 햇살과 서늘한 나무 그늘과 고즈넉한 무덤가를 거닐다 보니, 맘이 참 좋으면서도 괴로웠다. 외롭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분노도 더 이상 일지 않고 오직 남은 것은 슬픔뿐이었다. 그토록 열심히 몇 년이고 그를 사랑했는데.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 이렇게 나를 잃어버려도 괜찮을 만큼만 사랑했던 걸까? 나는 그를 잃을까 봐 가만히 있다가도 간혹 불안했는데. 그토록 따스하고 단단했던 5년 동안의 관계가, 사실은 나 혼자만의 상상 위에 지어져 있었던 걸까?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몇 명 있던 여행자들조차 서로 무덤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포슬하게 새 잔디가 자라고 있는 무덤가에서, 햇살이 참 너무도 좋은데, 이런 좋은 곳에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온 사람은 오직 나뿐인 것 같았다.
혼자 막창을 먹으라는 조상님의 계시
하루 종일 굶었지만 여전히 배는 고프지 않았다. 허기가 없어지니 여행이 참 편해지더라. 식당을 알아보고 밥 먹을 시간을 계산할 필요 없이 내 목표는 오직 고분군. 그리고 막창. 막창은 이제 더 이상 하나의 메뉴 또는 음식이 아니라 무슨 상징과도 같았다. 대구에 와서 혼자 막창을 먹으면 나 스스로가 훨씬 튼튼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라고 해서 그걸 못 먹으면 무언가에 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혼자 먹으러 갔다. 마침 숙소 바로 옆에 사람들이 추천하는 막창집이 있었다. 당당히 들어가서 '한 명이요' 하고 일부러 중간쯤에 앉았다. 에어컨 바로 밑의 구석탱이에 앉기는 싫었다. 2인분을 시켜서 한조각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맥주도 한 병 깔끔히 비웠다. 막창엔 사실 소주인데. 혼자 여행 와서 만취하면 좀 그러니까 이건 타협하기로.
대구에서 혼자 먹은 막창은 정말, 너무너무 맛있었다. 입맛이 없었다고 쓰기 민망할 만큼 소스까지 싹 긁어먹고 왔다. 이 맛있는 게 왜 서울에 없나 억울할 정도.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아직 많으니까
혼자 여행 다니는 걸 원래 좋아했다. 그와 연애하기 전에는 주말에 약속이 없으면 훌쩍 아무 데나 기차 타고 가서 하루 자고 오는 게 일상이었다. 오랜만에 이렇게 혼자 여행을 다녀오니 내가 이걸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떠올랐다. 잊었던 즐거움을 발견해서 들뜨고 신나는 기분이었다.
세상엔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많으니까. 혼자여야만 느낄 수 있는 것들도 있으니까.
외로워하기 말고도 할 일이 아주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