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6일째. 언니, 나 헤어졌어

헉 슬퍼? 응 많이

by 하마

5년의 연애가 끝났음을 주변에 털어놓은 순서는 친구-친동생-친한 언니 순이었다. 엄마와 회사 동료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전 애인을 실제로 만났던 사람들에게만, 그중에서도 자주 만났던 이들에게 먼저 헤어졌음을 알렸다.


헤어졌다는 소식을 알리는 것이 왠지, 정말 왠지 모르겠지만 어딘가 창피했다. 아끼고 사랑하던 이가 바람을 피웠다고 말하는 게 마치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불쌍하고 안쓰러운 역할에 익숙하지 않았고, 그렇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슬퍼? 응 많이

나이 차이가 좀 나는 동생의 첫 반응은 '헉' 그리고 두 번째는 '슬퍼?'였다. '헉'과 '슬퍼'가 너무 빠르게 연달아 와서 웃기면서도 슬펐다. 응 많이 슬퍼. 동생과 친하게 지내는데도 내 애인을 동생에게 보여준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초반엔 어색해하다가 둘이 내 욕도 하면서 맥주 한잔을 함께 하고 곱창을 같이 먹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언젠가 동생이 나에게 그를 사랑하냐고 물었을 때 내가 망설임 없이 '응'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동생은 내 대답의 스피드와 확신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이번에도 역시 스피드와 확실함을 담아 대답했다. 많이 슬퍼.


앓다 보면 어느 날 뚝 떨어질 거야

나에게 있어 연애의 조언자 역할인 '편집장 언니'는 이 연애의 가장 가까운 목격자 중 한 명이다. 사귀기 시작할 때 내가 에디터로 일했던 잡지사의 편집장이었기에 시시콜콜한 연애 초기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퇴근 후 술도 자주 마셨다. 언니의 결혼식도 전 애인과 같이 갔다. 다니던 회사는 그만두었지만 언니와의 우정과 애인과의 연애는 지금까지 5년째 이어졌다. 언니가 언제나 전 애인을 칭찬하며 했던 소리가 '걔는 허튼짓할 놈은 아니다'였는데. 언니, 걔가 엄청난 허튼짓을 했어요.


연애가 깨졌다는 소식을 전했더니 언니는 푹 앓다 보면 언젠간 감기처럼 뚝 떨어질 거라고 나를 토닥였다. 낫지 않는 경우는 없더라며. 사랑하는 사람에겐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걸 해주는 것만큼 싫어하는걸 안 하는 게 중요하다고. 걔는 그걸 지키지 않았으니 자격이 없는 거라며.


언니의 우여곡절 연애사와 이별들을 지켜봐 왔기에 언니가 말하는 '낫지 않는 경우는 없더라'라는 말이 큰 위로가 되었다. 언니가 그렇다면, 기다려볼게.


혼자를 만끽하는 타입이라면

친구들이 나를 자주 불러내 주었다. 친하긴 하지만 다들 현생이 바쁘다 보니 두세 달에 한 번씩 보곤 했는데 내가 헤어진 뒤에는 일주일 동안 세 번이나 약속을 잡아두었다. 두 번째로 친구들을 만났을 때 나는 사실 혼자 퍼마신 술 때문에 숙취에 찌들어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저녁까지 보드게임을 했다. 다섯 판째 게임을 시작하며 아 이제는 혼자 좀 있어봐야겠구나 생각했다. 혼자 있지 않으면 주변 사람과의 관계도 망가뜨리게 되겠구나 하고.


사람마다 타입이 다르겠지만 나는 우울하면 바닥을 쳐야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다. 괜히 즐거운 노래를 듣고 누군가와 어울린다고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다가는 다른 이에게 신경질이나 내지. 대신 아예 혼자 슬픈 노래를 들으면서 골방이든 어디에 처박혀 있으면 언젠가는 다시 바닥을 차고 올라올 수 있는 타이밍이 있다. 늦든 빠르든 그 타이밍은 언제나 왔다. 언니가 '안 낫는 경우는 없다'라고 확신했듯 나 역시 타이밍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혼자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표지 이미지 : <WHERE'S WALLY?>_MARTIN HANDF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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