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람 없는 모든 직장인에게 박수를
대체 어떻게들 저녁을 먹고 사나요?
매일 밥 해 먹는 직장인이 있다면 이 자리를 빌려 존경을 표한다. 9 to 6 근무를 하면서 대체 어떻게 저녁을 해 먹을 수 있을까? 주 52시간 근무를 더 늘리네 마네 말이 많았지만, 나는 그마저도 저녁이 있는 삶을 살기에는 턱없이 긴 노동시간이라고 생각한다. 6시에 퇴근하고 집에 도착하면 7시, 저녁을 요리해서 식탁에 차려 앉으면 7시 반~8시, 다 먹고 나면 8시 반~9시. 중간중간 손발도 닦고 옷도 갈아입었다면 무조건 9시가 넘게 된다. 정시 퇴근하고 밥만 먹었는데 말이다.
게다가 한국에서 매일매일 정시 퇴근을 할 수 있는 회사가 과연 몇이나 될까? 일단 나는 그런 회사에 다닌 적이 없다. 일주일에 며칠이라도 최소 30분~1시간 일을 더 하게 되는 날은 밥만 먹고 씻고 누워도 깜깜한 밤이 된다. 인생, 이게 맞나?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이 모든 9 to 6 사이클은 집에 살림꾼이 있을 때 그나마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삶의 형태다. 내가 회사에 가있는 동안 장을 보고 빨래를 하고 저녁밥을 차려두는 사람이 있다면 집에 도착하자마자 밥을 먹고 약간의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오로지 그 경우에만 일반적인 출퇴근과 삶의 공존이 가능하다.
집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삶의 구조
남자친구가 의도치 않게 얼마간 백수로 지내면서 나는 이런 삶을 잠깐이나마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요리를 잘하고 깔끔한 성격인 남자친구가 집에서 함께 지내며 아침엔 도시락, 퇴근하면 저녁밥을 차려주는 삶을 살게 된 것. 마치 옛날의 부부 역할이 뒤바뀐 듯한 모습 같기도 했고, 놀러 온 친구들도 남자친구를 요리 잘하는 참한 안사람이라며 재미있어했다. 남자친구 본인도 은근 살림하는 주부로서의 삶을 즐겼다.
직장인이 집에서 저녁밥을 먹는 것은 이런 생활 형태일 때 안정적으로 가능하더라. 퇴근하면서 전화 통화로 저녁 메뉴를 상의하고 집에 도착하면 거의 다 차려진 저녁밥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생경한 삶의 풍경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도시락을 들고나가며 오늘은 저녁으로 뭘 해달라고 할까 고민했고, 퇴근하면 밀려있던 빨래가 뽀송하게 말라있었다.
남자친구는 집안일을 하다 보면 하루가 다 간다고 투덜대면서도 살림꾼 포지션을 알뜰히 즐겼다. 주말마다 마트 전단지를 펼쳐 이번주에는 어떤 식재료로 저녁밥과 도시락을 만들까 논의했다. 남자친구가 친구들과 약속이라도 있는 날은 당장 집이 휑해지고 수건 빨래가 쌓여갔다. 누군가가 나 대신 집을 가꾸고 식사를 차린다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가부장제의 사이클은 아마 그래서 견고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집에서 삶을 꾸리는 보조인으로서 기능하고, 가장은 그렇게 꾸려진 삶을 토대로 더 길고 강도 높은 노동을 처리하는 삶. 더 나쁜 근로 환경에서도 20~30년씩의 장기근속이 가능했던 것은 누군가가 탄탄하게 삶을 다져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직장인,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 것인가
살림꾼 없이 먹고살아야 하는 직장인에게는 두 가지의 옵션이 있다. 매일 외식을 하고 집안일은 최대한 기계와 서비스의 도움을 받는 것. 두 번째는 유흥을 멀리하고 아주아주 부지런하게 집순이로 사는 것. 살림꾼과 한번 살아보고 깨달았다. 나는 두 번째 옵션은 불가능한 사람이더라. 만나야 할 사람도, 가야 할 약속도 많은 나는 가장 먼저 포기하는 것이 살림이었다.
내 결론은 관대해지자는 것이었다. 집이 조금 더러워지고 며칠간 계속 배달음식을 먹어도 스스로를 너무 타박하지 말자. 매일 출퇴근을 하며 끼니를 챙겨 먹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직장인은 뿌듯해해도 되는 존재다. 우리에겐 최선을 다해 챙겨 먹여야 할 토끼 같은 우리 자신이 있다. 평일 한껏 어질러진 집을 주말에라도 조금씩 치우고 있다면 그것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매일의 집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매일의 저녁 식탁이 풍족하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일상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