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회사에 팔고 있는 건 노동력이 아니라 시간

자율출퇴근으로 1년을 살아본 결과

by 하마

새로운 회사에서의 폭풍 같은 일 년 동안, 수많은 일과 억울함이 있었지만 그 모든 어려움을 차치하고도 나를 머무르게 만든 것은 딱 하나 바로 자율출퇴근제였다.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나 역시 평생 지정된 시간까지 학교와 직장에 도착해야 하는 삶을 살았다. 퇴근은 늦어질 수 있어도 출근은 9시까지 해야 한다는 룰은 직장생활의 그 무엇보다 우선했다. 아무리 거지 같은 회사라 한들 직원이 지각을 밥 먹듯 한다면 주변 사람들은 우선 직원을 욕할 것이다. 심지어 직장이 아닌 알바라도 제시간에 출근하는 것은 기본이니까.


그러다가 갑자기 찾아온 자율출퇴근제라는 혜택은 충격적으로 좋더라. 지금 회사는 완전한 자율출퇴근제로, 내가 몇 시에 출근할지조차 미리 공유하지 않는다. 그날 내가 늦잠 자고 싶으면 11시까지 가고, 일찍 가고 싶으면 8시 5분에 가도 된다. 그렇기에 이 회사에는 지각이란 것이 없다. 1분이든 33분이든 내가 도착한 시간이 일을 시작하는 시간이다. 자율출근을 이미 경험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게 뭐가 대단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제도를 12년 직장생활 중 처음 경험하는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다.

1년 후 자율출퇴근에 대한 나의 긍정적이었던 입장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자율출근제를 완전하게 도입할 수 있는 배경은 노동자가 정해진 노동 시간을 초과해서 채울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회사는 기본적으로 일이 많고, 어느 누구도 놀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밖에서 보기에는 '그렇게 하면 근무자들이 다 노는 거 아냐?'라고 생각할 정도로 자율성을 부과할 수 있다. 자유롭긴 하지만 결코 좋은 회사는 아니다. 야근수당이 없는 포괄임금제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야근을 할 것을 허락받은 느낌도 좀 든다. 일이 많은 대신 선택권을 부여받은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 처음으로 스스로 시간을 관리하는 경험은 달콤하더라. 사람은 누구나 아침에 일이 잘 되는 사람, 저녁에 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 있다. 나는 아침에 일찍은 일어나지만 머리가 돌아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는 쪽이다. 그래서 눈은 6시에 떠도 침대에서 일어나는 건 8시일 때가 많다. 자율 출근제는 그런 내가 아침을 먹고 정신을 차리고 말짱한 머리로 집을 나설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줬다. 컨디션이 좋은 날은 일찍, 아침에 일이 있는 날은 늦게 출근할 수 있다는 마음의 여유도 있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특히 정수기며 에어컨 수리며 집에 사람이 와야 할 때 여차하면 반차까지 써야 하는 상황이 많은데 자율출근제 덕분에 거의 대부분의 일을 평일에도 해결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퇴근은 3시간 늦게 했는데 아침에 1분 늦었다고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없다는 게 가장 좋다. 언제든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출근할 수 있다는 게.


우리가 직장인으로서 힘든 것은 시간이 없기 때문도 있지만 시간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더라. 똑같이 시간이 적어도 그 시간을 내가 조율할 수 있다면, 같은 노동자로서도 조금 더 나의 삶을 스스로 컨트롤하는 기분이 들었다. 노동자로서 삶의 시간이 온전히 나의 것일 수는 없기에, 시간표라도 스스로 짤 수 있다는 것은 꽤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년 후...

자율출근으로 1년을 살아보니 고마웠던 마음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고, 이 제도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는지 여실히 깨달았다. 모두가 자유롭게 일하지만 모두가 초과근무를 하고 있는 이 회사는, 자율출근이 오히려 노동자를 마음껏 부려먹을 수 있는 장치였다. 누군가는 11시부터 밤 9시까지, 누군가는 8시부터 밤 10시까지 자유롭게 일하며 자유롭게 근무시간을 초과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트래킹은 거의 전무하다. 즉 자유를 빌미로 사실상 초과 근무를 허용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팀원들의 근무의 질에 대해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고, 그런 회사에서 업무량이란 끝없이 늘어나기만 할 뿐 줄어드는 경우는 없었다. 초과근무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회사와 노동자 모두 하지 않는 최악의 상황인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회사에 내가 팔고 있는 것이 노동력인 줄 알았는데, 자율출퇴근으로 살며 뼈저리게 깨달았다. 우리가 팔고 있는 것은 시간이다. 일이 많은 회사에서의 자율출퇴근이란 가령 이런 것이다. "은행 업무? 반차는 무슨, 아침에 잠깐 다녀오고 출근하면 되지.", "병원 진료? 조금 일찍 퇴근해서 다녀오면 되지." 그러나 그 외의 모든 시간은? 온전히 회사의 것이라는 의미였다.

삶에서 최소한으로 필요한 내 시간을 '자율'로 사용한 뒤 나머지를 모두 반납하는 삶. 내가 왜 자율적으로 시간을 관리하는데도 근래의 1년이 이토록 허덕거리는 기분이었는지를 반추해 본 결과였다.


각자에게 맞는 근무 방식이 있겠지만, 나는 ‘다 같이 효율을 추구하는 방식’이 더 낫다고 본다. 노동자가 초과근무를 하면 회사는 비용을 더 지불해야 하고, 비용절감을 위해 노동자의 근로를 효율화하기 위한 전략을 함께 세우는 회사. 이런 기본적인 룰 없이 자율성만 부과하는 경우 회사는 비용을 지출하지 않고 얼마든지 초과 인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손해보는 장사를 하는 회사란 없다니깐.

잠시나마 고맙다고 생각한 과거의 나여, 반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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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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