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구멍이라니!
여러 번의 이직 끝에 오랫동안 간절히 원했던 회사에 입사한 나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이 회사를 오래 다니면서 드디어 유목민에서 정착민의 생활로 바뀌는 것일까. 더 이상 이직이나 퇴사를 고민하지 않고 고정적인 수입이 틀어질 걱정 없이 집도 사고 대출금도 갚으며 상상하던 '30대의 삶'을 살게 되는 걸까?
내 헛된 상상은 입사 일주일 만에 깨졌고, 일 12시간의 업무량과 이해할 수 없는 프로세스의 향연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중, 청천벽력 같은 연말 평가서를 받았다. 등급으로 치면 5등급 중 4등급. 거의 꼴찌나 다름없는 평가였다.
일단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대여섯 번의 이직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일을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던 적이 없다. 언제나 좋은 평가를 받아왔고 곧장 대표의 신임을 얻었고 연봉 협상에서 25% 이상의 인상을 (내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통보받기도 했다. 첫 회사부터 나를 좋게 봐주고 예뻐해 주는 윗사람들과 잘 따라주는 후배들을 만났고 회사에서의 나의 입지는 늘 좋았다. 십여 년 만에 처음 받는 최하위급 성적표였다.
그 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헤매다 보니 벌써 상반기가 지났고, 6개월 만에 똑같은 성적표를 한 번 더 받았다.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상태다. 아마 이런 얘기를 하는 대부분의 유튜브나 블로그들은 '이런 역경을 이렇게 극복했다'는 개발적인 내용을 담을 테지만 나의 역경은 현재 진행형이기에, 답을 찾지도 못했기에, 그냥 이런 상황에 부닥친 직장인의 심경을 고백하고 싶어졌다. 평가란 누군가 1위 성적표를 받으면 꼴찌도 당연히 있을 텐데 그들이 모두 해결책을 마련하는 데 성공하진 못할 테니까. 그들 역시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이야기일 테니까. 나 역시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아무에게도 말 못 했기도 하고.
이 회사에서 내가 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것도 아니지만, 회사가 원하는 것을 내가 하고 있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새로운 거래처의 입점, 그리고 플랜을 짜서 실행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 여기는 회사인데 나는 그 두 가지에 모두 집중하지 못했다. 그 외의 업무만으로도 나의 하루는 꽉 차 있었고, 업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스티브 잡스의 논리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업무 목표가 SIGNAL, 나머지가 NOISE라고 한다던데 나의 업무는 지금 NOISE로 가득 차 있는 상황이다. 집중해야 하는 SIGNAL이 무엇인지 분명 알고 있지만 거기에 집중하려면 NOISE를 삭제하지 않고는 24시간을 일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상황을 타개할 수 없었던 첫 번째 이유였다.
'구덩이에 빠졌을 때 해야 할 일은 구덩이를 더 깊게 파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영화 <메기>에 나오는 대사다. 지금의 상황이 구덩이라면, 나는 우선 오늘 파야 하는 구덩이를 파고 난 뒤에는 집에 가서 쉬고 싶은 욕구를 버리지 못했다. 새로 생기는 구덩이들을 매일 파느라 12시간씩 일했고, 당장 급한 구덩이를 다 파고 나면 기진맥진해서 내일의 구덩이를 없앨 방법을 강구할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대부분의 회사에는 당연히 어떤 문제가 있다. 그 문제를 해결할 솔루션을 찾아내는 시간, 솔루션을 실행해야 한다고 누군가를 설득하는 시간, 그걸 실행할 시간은 나에게 주어진 기본 업무를 대체할 수 없다. 무조건 추가 업무다. 그걸 하라고 시간을 주는 회사란 당연히 없다는 걸 알고있지만, 대부분의 회사에서는 그 추가 업무 시간이 그렇게 비합리적이지 않았다. 몇 번의 야근을 하고 나면 계획이 좀 세워졌고 답을 찾았다는 기분이 들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구덩이를 파는 시간이 기본적인 업무 시간을 엄청나게 초과해야만 다 끝낼 수 있다. 그런 뒤에 솔루션을 찾자면 시간은 밤 열두 시. 그때의 나는 이런 상태가 된다.
'일단 오늘은 끝났으니 내일은 일단 다시 구덩이를 파자. 대신 열심히 해서 조금 일찍 파자. 솔루션은.... 그다음에 생각해 보자. 오늘은 일단 눕자.'
이 일상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 회사에서도 누군가는 구덩이를 메우고 있을 것이다. 솔루션을 찾고 설득하고 실행하고 개선했을 것이다. 나는 그들보다 체력이든 역량이든 의지든 무엇 하나, 또는 그 이상이 부족했다. 내 탓만은 아니었지만 내 부족함은 분명히 있었다.
일단 이런 상태다. 아직 해결점을 찾지 못했고, 하루는 ‘나 그래도 상반기보다 좀 나았나?’ 했다가 또 하루는 ‘회사에서 원하는 걸 여전히 못하고 있는 거 아닌가?’로 돌아간다. 생각이 매일 바뀌고 불안하고, 그러다 화도 난다. (나더러 뭘 더 어쩌라는 거야!) 말 그대로 롤러코스터다. 자기계발 유튜브들? 내용은 알겠는데 현실에서는 그럴 시간이 없는 경우도 있어요. 상급자 면담? 해봤고 소용없었어요. (“음.. 일단 열심히 해보시고^^” 이런 수준)
그냥 이런 경우도 있다고, 그 안에서 1년째 허덕이는 사람도 있다고, 그 사람이 평생 구멍이었던 건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맞지 않는 회사도 있다. 나도 이 회사가 별로지만 회사도 나를 별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사람 사이에도 둘다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서로 친해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듯 말이다.
그러니 우리 현재의 구멍들, 너무 좌절하고 잠 못 자고 병 생기지 말자고요, 우리. 회사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
만약 회사의 저평가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다? 그렇다면 세상에 이보다 더 큰 문제도 많은데 오히려 다행 아닌가! 잘린다면 실업급여 받고 좀 놀지뭐. 우리에겐 급전을 위한 쿠팡 알바가 있다!
내 인생에 지금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회사 따위 당장 날 자를 것도 아닌데 일단 버티지 뭐. 돈 들어오면 된 거 아닌가!
매일 이렇게 마음은 왔다 갔다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버티고 있다.
다음번엔 그래서 2주째 수면제를 복용하고 있는 후기 (수면영양제, 수면유도제 아니고 진짜 정신과 수면제),
그리고 하필 최악의 구직난에 준비하는 이직의 현실에 대해 써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