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라도 잠들고 싶어지는 불면의 밤들

수면제를 처방받고 다시 나다움을 되찾다

by 하마


회사에서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하면 나는 가장 먼저 식욕을 잃고, 그 후에는 바로 불면의 단계가 온다. 평소에는 3일 동안 밥 먹는 시간 빼고 내리 잘 수도 있는 사람이지만 불면증이 시작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불면증은 졸린가? 싶어서 누워도 무섭도록 잠이 안 오는 날부터 시작된다. 타이밍 좋게 까무룩 잠이 들더라도 새벽에 깬다. 새벽 세네시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두 시간쯤 자고 12시에 깨버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럼 이제 남은 밤은 지옥이 된다.


유튜브에서 불면증일 때 하라는 대로 다 해봤다. 일어나서 다시 잠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도 하고 따뜻한 것도 마시고 책도 읽어봤는데 그러다가 다시 졸릴 듯 말듯해서 누우면? 잠이 안 온다. 밤새 눈감고 누워있어 보기도 했는데 그 역시 무섭도록 맨 정신으로 온갖 생각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평균 수면 시간이 3~4시간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하룻밤을 꼬박 새우면 다음날은 4~5시간쯤 자고 다시 그다음 날은 운에 맡기는, 불면 로또를 긁는 듯한 날들을 보내다가 이틀 연속으로 아예 한숨도 자지 못한 날이 생겼다. 이미 그 주간의 나의 수면 시간은 평균 4시간. 나는 최소한 7~8시간은 푹 자야 머리도 몸도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몸뚱이를 가졌는데 평균 4시간에 이틀을 거의 0~1시간으로 자버리니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면역 질환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무엇보다 머릿속에 피곤과 짜증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더라.


그날 정신과를 찾았다. 그전에는 한 번도 정신과를 가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불면에 좋다는 영양제(멜라토닌, L-테아닌, 트립토판 등)를 다 열심히 먹어봤고 내과에서 가볍게 처방해 주는 수면 유도제도 먹어봤다. 모두 먹은 첫날 정도는 효과가 있었지만 다음 날부터는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이제 답은 수면제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 간 정신과는 생각보다 평범했고, 생각보다 불친절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기력해 보이는 병원 접수처 간호사들이었다. 평범하게 접수를 하고 난 뒤에 핸드폰으로 검사지를 보내는데 1점부터 5점까지의 점수로 내 내상태에 대해 스스로 선택하는 방식이었다. 일상에서 얼마나 긍정적/부정적인 생각을 하는지, 내 주변에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등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때의 나는 거의 최악의 상태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내 답변은 대부분 부정적인 점수에 가까웠다. 실제 나의 생각이 너무 부정적이라 조금 중화시켜서 체크하기도 했다. "지금 우울하세요?" 굉장히 우울하여 5점에 가깝지만 오늘은 수면제를 받고 드디어 잘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니 4점에 체크. "주면에 누군가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나요?" 0점, 아무도 없다는 기분이 들지만 곧 의사가 나를 도와줄 테니 1점에 체크.


1분 만에 카톡 설문지를 끝내고 만난 정신과 의사는 자판기 같았다. 심리상담소가 아니니까 대단한 상담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잠을 못 잔다는 나에게 '본인이 생각하는 이유가 있느냐'길래 최근에 회사에서 스트레스가 심해졌다고 답했고, 그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견 없이 불면을 다스리는 법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혹시 환자분이 들어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음) 수면에도 수면 위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잠들기 직전에는 너무 밝은 빛을 쬐거나 운동하는 것을 피할 것, 잠이 안 온다면 바로 침실을 빠져나와 다른 장소에서 시간을 보낼 것. 이때 당연히 전자기기는 안되고 책도 사실 좋지 않아요. 명상을 하세요.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 좋고 너무 어렵다면 음악을 듣는 것 정도는 괜찮아요."


놀랍게도 의사가 한 말은 내가 병원에 가기 전 유튜브에 찾아봤던 내용과 100% 일치했다. 유튜브에 '불면'을 치면 나오는 아주 기본적인 설명이었다. 근데 내가 기함한 건 그다음 말이었다.


"잠 며칠 못 잔다고 사람이 죽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사람은 더 자고 있기도 하고요. 한두 시간 잤다고 생각해도 실제로 검사를 해보면 그보다 오래 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러니 잠을 못 자도 괜찮다~ 생각하고 부담을 좀 덜어내 보세요."


이 말을 듣고 나는 놀랍게도, 그 의사를 한 대 치고 싶었다. 죽지야 않겠지요. 당장 내가 일주일을 꼬박 0시간 잔다 해도 그대로 깨꼬닥 죽기야 하겠습니까. 다만 죽고 싶겠지요. 차라리 이대로 죽어서라도 잠을 좀 잤으면 좋겠다 생각하겠지요. 그래서 온 거 아니겠습니까, 의사양반?


불면으로 인해 현재 면역 질환이 생겼고 실제로 몸과 일상에 이상이 있다고 부연설명을 하니 의사가 약간 버벅거렸다. 그러고 다시 처음의 수면 위생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걸 보면 의사에게는 어떤 프로토콜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불면으로 병원에 온 1회 차 환자에게는 수면위생, 불면에 대한 불안을 줄여주는 말을 하기. 2회 차, 3회 차에는 다른 프로토콜이 있겠지. 유튜브 틀어두고 영상이 끝나면 약이 떨어지는 자판기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래도 다행히 의사는 나에게 수면제를 처방해 주었고 약을 한 달째 먹으며 나는 다시 수면을 얻었다. 약을 먹은 첫날 한 번도 깨지 않고 8시간을 자고 일어난 나는 그 의사를 '명의'로 생각하기로 했다. 상담이 무슨 소용이냐, 다 필요 없다. 나를 재워준 그분은 진정한 이 시대의 명의다! 일주일마다 약을 받으러 가는 나의 표정은 아마 처음에 '저 의사새끼 때릴까?' 생각하던 얼굴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의사에게 대한 분노도 불면 때문에 생긴 격한 감정이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균 수면시간이 6~8시간으로 올라가니 나는 다시 내가 되었다. 그 전의 내가, 사실상 거의 잠을 못 자게 된 최악의 시기 이전에도 약한 불면이 지속된 몇 달 동안 내가 얼마나 나답지 못했었는지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유머를 가장 먼저 잃었고 사람은 다 싫었고 머리는 멈춰있었다. 지금도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나다운 생각을 하고 나다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회사에서 넌지시 나와 같은 불면을 겪는 이가 있는지 물어봤는데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는다 한들 잠을 못 자는 사람은 거의 없더라. 수면제 경험자가 있다면 약의 종류나 복용 기간 등에 대한 정보를 좀 나눠볼까 했는데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수면제를 먹는다'는게 꽤 큰 일로 느껴지는지 얘기를 들은 사람들이 나를 굉장히 걱정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이 힘들었으면..?'이라는 생각이 드나 보다. 물론 일이 힘들기야 했겠지만 잠을 못 잔다는 것이 실질적으로 가장 힘든 부분이었어서 오히려 지금은 그전보다 나은데도, 남들에게는 수면제를 먹는다는 게 일반적이지는 않은 상황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나 역시 유튜브의 수많은 영상을 보고 수면제에 대한 불안감을 가졌던 사람으로서, 아직 한 달밖에 약을 먹지 않은 초보자이지만 수면제가 일단 당장의 나를 도왔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나는 수면제가 살렸다. 이 약을 오래 먹다가 내성이 생기고 의존증이 생겨서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의 나는, 그래도 잠은 잘 수 있는 나다.


잠을 자지 못해서 허겁지겁 허둥지둥 몽롱하게 살던 시간 동안은 삶에서 부유하고 있다고 느꼈다. 불면의 시기에는 둥둥 떠다니며 어느 것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나의 결정을 내가 믿을 수 없는 시기였다. 잠을 자는 나는, 최소한 다시 결정을 내릴 수 있고 스트레스의 근원에 대해서 생각할 수도 있게 되었다. 만약 잠을 자지 못하는 상태로 퇴사를 결심한다면 그 과정은 아마 굉장히 매끄럽지 못했을 것이다. 당장 잠을 자려고 삶을 내팽개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실제로 그렇게 퇴사했던 적도 있었다) 결과가 같더라도, 6시간 이상 잠을 잔 사람과 1시간을 잔 사람이 지나는 과정은 다르다. 일상에 다시 발을 디디고 직접 걸어갈 수 있게 해 준 건 수면제가 되찾아준 잠 덕분이었다.


수면제 예찬론처럼 들리겠지만 잠에 대한 예찬이다. 사람은 잠을 자야 한다. 잠을 쪼개서 운동을 하고 자기 계발을 한다? 절대 반대다. 컴퓨터도 팽팽 돌리기만 하면 점점 파일을 처리하는 속도가 느려지듯 한번 껐다 켜는 건 너무 중요하다. 나는 요즘 배터리 방전되기 전에는 평생 안 끄던 핸드폰도 가끔 의식적으로 꺼준다. 그게 가능하다면 나 자신도 버튼을 눌러서 손쉽게 껐다가 8시간 뒤 알람이 울리듯 자동으로 켜지게 하고 싶다. 그렇게 깨끗하고 산뜻한 잠을 잘 수 있는 이들은 그것이 축복임을 꼭 알았으면 좋겠다. 그 축복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전통적인 '오복'에는 흔히 말하는 치아가 포함되지 않는다. (壽, 장수), (富, 부유함), 강녕(康寧, 건강), 유호덕(攸好德, 덕을 좋아함), 고종명(考終命, 천수를 다 누리고 편안히 죽음) 이렇게 다섯 개가 전통적인 오복의 의미이다. 이중 강녕을 치아로 해석하는 것이 현대에 말하는 '오복의 하나가 치아'라는 말인데,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 강녕은 잠이다. 아무리 잘 먹은들 잠을 못 자면 사람은 죽는다. 못 먹어서 죽는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정신이 죽는다. 우리가 우리다워지는 건 잘 씹어 삼킨 음식으로 이루어진 몸뚱이보다도 푹 잔 머릿속 정신 덕분이다. 잘 자자. 푹 자자.



PS.

1. 먹고 있는 수면제는 '루나팜', 플루니트라제팜 성분이다. 꽤 강한 수면제에 속하고 데이트 강간 약물로도 알려져 있을 만큼 위험성이 적지 않다.(한국 외 국가에서는 금지 약물이다) 더 흔히 사용하는 수면제는 '졸피뎀', 졸피뎀 타르타르산염 성분으로 충동과 몽유병, 기억상실을 유발한다고 알려져 있다. 루나팜도 의존성, 금단현상이 있지만 졸피뎀과 같은 증상은 아직까지는 없었다. 한 달째인 지금도 아직 내성은 없다. 한 알로도 잘 잔다.


2. 수면제를 먹을 때 회사에는 오픈하지 말자.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 수면제, 항정신성 약물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지는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굳이 말할 필요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3. 수면제를 먹거나 정신과에 가기 전, 의사가 말한 수면 위생을 최대한 지켜보는 것이 당연히 좋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수면 위생을 철저히 지켜보는 노력을 다 하고 나서 수면제를 먹은 건 아니었다. 잠들기 직전까지 노트북을 들여다봐야 했고, 잠을 못 자도 괜찮다고 안심하기엔 언제나 다음날의 일정이 너무 많았다. 가능하다면 최대한 유튜브에서 말하는 '수면을 위한 노력'을 전부 공들여 해보고 병원에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수면제를 먹지 않아도 그 단계에서 대부분 해결이 되기 때문에 주변에 수면제 복용 경험자가 많이 없는 걸 수도 있다.


4. 요즘 나 좀 잘 자는데? 싶지만 섣불리 단약은 하지 않았다. 대신 금, 토 이틀은 약을 먹지 않는다. 주말은 잠을 못 자도 다음날이 어차피 휴일이니 아무 걱정 없이 놀다 보면 대충 몇 시간은 잔다. 일요일부터 목요일까지 평일은 그냥 루틴처럼 루나팜을 먹고 잔다. 가장 나쁜 단약의 경우가 의사와의 상의 없이 약을 끊고 한숨도 못 잔 뒤 '아 나는 약 없이는 못 자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라고 인터넷에서 봤다. (의사가 친절하게 이런 내용까지 말해주는 건 아니다.) 언제쯤 이 수면제를 줄이거나 끊거나 변경해야 할지, 혹시 평생 먹게 되는 건 아닐지에 대한 불안은 일단 넣어두기로 했다. 답을 찾은 경험자가 있다면 부디 알려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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