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회사 타이틀은 잠시 아껴두세요, 더 최악이 와요
올해가 아직 8월밖에 안되었는데 나는 벌써 세 번째 이직을 준비 중이다.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입사와 퇴사를 반복한 것이 처음인 만큼 새로운 깨달음도 있는데 바로 최악의 회사란 얼마든지 갱신될 수 있다는 것. 내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최악은 알고 보니 깜찍한 수준이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회사와 상상 이상의 대표들, 예상을 뛰어넘는 사건들이 있다. 방심해선 안된다.
사람이 나쁘냐 좋냐를 떠나 일을 못하는 게 제일 문제
가장 마지막으로 그만둔 회사는 놀랍도록 일을 못하는 사람들만 모아둔 곳이었다. 관련 경력은 거의 전무한 2-4년 차의 실무자들이 각 파트의 선임급으로 앉아있었고 중간관리자는 몇 달째 공석이었다. '대체 이걸 왜 이렇게 하지?', '왜 이걸 안 하고 있지?' 어리둥절하고 당황한 상태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니 한 달도 되기 전에 원인을 알게 되었다. 대표가 업무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어쩐지 면접 질문이 너무나도 두리뭉실하더라니. 중간관리자가 없었다 보니 대표가 면접과 채용을 주도하는데 해당 포지션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채 맘에 드는 사람을 뽑아서 대충 앉혀둔 것. 1-2년째 제멋대로 일을 하고 있었던 실무자들은 쓸데없는 고집까지 생긴 상태였다.
넷플릭스는 '일 잘하는 사람만 뽑는다'는 것을 복지 중 하나로 내세운다. 그만큼 동료들의 능력치는 직장에서 중요하다. 12년의 직장 생활에서 다양한 빌런과 고문관을 겪어봤지만 회사의 거의 대부분의 인력이 동기부여도 없이 제 몫을 못하는 상황은 처음이었고, 그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는 대표 역시 처음 만난 유형의 사람이었다. 게다가 난 중간관리자로 입사한 상태. 난관이 많았다.
이렇게까지 된 이유는 단 하나, 대표의 무능보다도 회사에 돈이 많아서였다. 돈을 잘 버는 가족의 모기업이 따로 있어서 매출 압박이나 자금 걱정이 전혀 없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도 회사가 유지될 수 있었다. 실질적인 매출을 내야 하는 진짜 회사였다면 진작 망했거나 사람을 다 갈아엎어서라도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다. 대표의 목표 자체가 돈을 버는 것이 아니기에, 매출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상식적인 직장인에게는 당황스러운 상황이 많았다. 그 회사의 목표는 멋져 보이는 것이었고 '멋짐'이란 내 이력서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개념이었다. 4달을 버티다가 퇴사했다.
바빠도 문제, 한가해도 문제
재밌는 건 내가 작년에 4년을 다닌 전 직장을 그만둔 이유 중 하나가 '지원이 너무 없어서' 였다는 것이다. 짠돌이 회사에서 온갖 예산과 비용을 아끼다가 지쳐 나가떨어졌는데, 정작 돈이 많아서 촬영에 몇 천만 원은 우습게 쓸 수 있는 회사에 왔더니 이번엔 돈이 너무 많아서 문제라니. 내가 상식적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은 돈을 벌지도 못하면서 미친 듯이 써재끼는 회사가 아니라 필요한 곳에 필요한 금액을 써서 효율을 내는 쪽이었다. 차라리 돈을 벌지 못하면 비용이라도 아끼는 짠돌이 회사가, 벌지도 못하면서 허세를 부리는 재벌보다 낫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올해 봄부터 두 달간 다녔던 또 다른 회사는 다녔던 모든 직장 중 가장 한가한 곳이었다. 하루에 해야 하는 업무량도 모호했고 얼마든지 농땡이 피울 수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한가롭게 회사를 다니면서 전 직장에서 쌓였던 업무 피로도와 떨어졌던 체력이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무료함과 무력감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퇴사할 때쯤에는 다시 바쁘게 돌아가는 회사에 들어가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몸이 근질근질했다. 직전 회사에서 너무 바빠서 카톡이 하루에 500개씩 쌓이던 것은 까맣게 잊고.
좋은 회사는 없고, 버틸 수 있는 회사만 있다
올해의 릴레이 입퇴사에서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좋은 회사는 없다'는 것이다. 일이 바쁘면 한가한 회사에 가고 싶고 회사가 돈을 너무 아끼면 자금이 풍부한 회사에 가고 싶지만, 그런 회사들이 꼭 내가 원하는 방향과 맞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자금이 풍부하면 돈을 아끼던 회사보다 더 이상한 곳에서 썩어있을 수 있고, 한가한 회사는 일이 바쁜 회사보다 성장력이 떨어진다. 불만스러웠던 것이 채워진다 해도 더 중요한 부분이 잘못되어 있을 수 있다.
퇴사와 동시에 진행된 면접에서 운이 좋게 합격이 되어 2주 뒤 입사가 또 예정되어 있다. 올해의 세 번째 이직처는 내가 아주 오랫동안 가고 싶어 했던 회사. 이미 메뚜기 같은 이직과 공백이 꽤 있던 터라 이번에서는 어떻게든 오래 버텨야 하는 상황이다. 가고 싶어 했던 만큼 이 회사가 좋은 곳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무의미해 보이는 입퇴사의 릴레이에서도 중요한 것을 배웠으니 힘내서 근속연수를 채워보려 한다. 누군가의 지옥이 나에게는 천국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괜찮은 현실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