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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마 Aug 04. 2024

퇴사 직전 다녀온 쿠팡 알바

할 만했나? 싶었지만 3일째 온몸이 아파요

일주일 뒤 퇴사가 확정되어 있고 다음 회사는 아직 미정인 지금, 갑자기 쿠팡 알바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치 못한 퇴사였고(내가 사직서를 내긴 했지만) 면접 중인 곳이 있는데 붙을지 모르겠는 상황. 불경기라 소비 심리는 위축되었고 취업 시장은 얼어붙었다고 난리이고 티몬 사태까지 일어나서 이커머스 시장은 체감상 IMF 수준이다. 대책 없는 백수가 되기에는 어쩌면 가장 안 좋은 시기. 좀 더 버텨볼 걸 그랬나? 싶기도 했는데 쿠팡 알바를 다녀오고서도 퇴사 자체는 하길 잘했다, 싶은 걸 보니 섣부른 결정은 아니었나 보다. 그걸 테스트해 보려 다녀온 것 같기도 하고.


당장 백수가 되면 일단 카드값부터도 대책이 없는 상황이라 면접 보는 곳이 떨어지면 알바라도 구해야겠다 생각하던 차였다. 그런데 구인 공고가 많지 않더라. '알바도 안 구해지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슬슬 들며 초조해졌다. 그때 사이트에 언제나 번쩍번쩍 1페이지를 장식하는 쿠팡 구인이 보였고 영 안되면 저거라도 해야 할 텐데 미리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더라. 마침 남자친구도 시간이 되어서 같이 지원을 했다.


이름, 나이, 성별만 넣었는데 지원 완료

구인 공고에 정말 기본 정보만 입력하게 되어있는 것이 일단 신기했다. 자기소개서, 경력기술서 전혀 필요 없이 이름, 나이, 성별, 집 주소, 일 할 날짜만 넣으면 끝이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같은 포부도 필요 없다는 게 마음에 들더라. 지원 동기 같은 것을 물을 때마다 드는 '돈 벌러 왔지'라는 생각이 여기서는 너무 당연해 보였다.

주간은 4만 원대, 야간 8만 원대, 심야 10만 원대 수당이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7시간쯤 일하는데 5만 원도 못 받는 건 너무하다는 생각에 야간(저녁 6시~새벽 1시) 타임으로 골라 신청했다. 며칠 전에 신청했는데도 연락이 안 오길래 '쿠팡도 떨어지는 건가' 우울했는데 당일에 연락이 오더라. 취소자가 많았던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가보기로 했다.


셔틀부터 심상치 않아

집 바로 앞에 셔틀이 있어서 이른 저녁을 먹고 눈누난나 출발했다. 인터넷에서 본 대로 커피, 마스크, 간식거리를 챙겼다. 대형 여행버스가 왔는데 한쪽 팔에 문신이 가득 있는 기사님이 그림처럼 앉아있었다. '심상치 않은데?' 생각하고 앉았더니 기사님 머리 위에 이런 문구까지 적혀 있어서 웃음이 터졌다.

"일 할 수 있음에 감사하자". 돌아오는 버스에서 찍었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셔틀버스가 여행 대절 버스여서 그런지 난 괜히 수학여행 가는 것처럼 들떴다. 싸 온 커피도 마시며 '무슨 일을 하게 될까?' 조잘거렸는데 같이 가는 남자친구는 셔틀에서부터 기분이 다운되기 시작했다. 택배 상하차 알바를 한 번 해본 그여서 운명을 알았던 게지. 나는 혼자 쓸데없이 해맑게 아이스팩 세척 같은 걸 맡게 되지 않을까? 의자는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휴게실에 도착해서 출퇴근용 앱을 설치하고 대략적인 설명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시작하기 10분 전 관리자로 보이는 분이 응원의 말을 하면서부터 불안해졌다. '쉬운 일 아니고 힘든 거 아는데, 다 같이 힘든 거니까 꼭 끝까지 화이팅하자'고 하더라. 저렇게까지 당부를 해야 하는 일이란 말이야? 하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소분 업무는 적재와의 싸움

내가 맡은 업무는 '소분2'라고 되어있었다. 다만 소분 업무로 분류되었어도 현장에서 어떤 쪽에 배정되는지에 따라 일이 다르더라. 나와 남자친구 둘 다 소분2였지만 작업 현장에 내려가자마자 업무 분장이 나뉘었고 끝날 때까지 서로를 보지 못했다. 남자친구는 7시간 내내 이 업무 저 업무 뺑뺑이 돌며 불려 갔다고 했다.


난 400번대의 컨테이너벨트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대부분을 일했다. 일은 너무나 간단하게도, 컨테이너벨트에 흘러오는 물건들에 적혀있는 숫자에 맞춰 460~465번의 거대한 카트에 적재하는 일이었다. 다른 아저씨 두 분과 같이 일했는데 두 분은 각각 450~454, 455~459를 맡아서 적재했다. 내 번호의 물건이 적을 때는 아저씨들 번호도 찾아서 넣어주고 아저씨들이 내 번호를 도와주기도 했다.


말로는 쉬운데 이 물건이라는 게 프레시백, 쌀 포대, 세재, 휴지 등 모양도 무게도 다양하다는 게 문제다. 그걸 내 키보다도 높은 카트에 최대한 많이 적재해야 한다. 왜냐면 그 카트가 다 차면 걔를 옮겨두고 새 카트를 가져오는 것도 나의 일이기 때문. 녹슬고 바퀴도 뻑뻑한데 꽉꽉 들어찬 카트를 이동시키는 게 진짜 힘들었다. 적재도 잘해야지 안 그러면 카트를 옮기다 물건이 무너져서 나를 포함한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다시 적재를 하는 것도 아마 내가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사태가 절대 일어나지 않도록 나는 적재에 미친 사람처럼 열심히 테트리스를 했다.


컨테이너벨트에서 번쩍번쩍 물건을 들어 옮기고, 카트에 쌓아둔 테트리스 모양이 맘에 안 들면 빼서 다시 쌓기도 하면서 2~3시간까지는 할 만했다. 아저씨들보다 내가 적재도 잘하는 것 같고 착착 쌓아서 안정적으로 머리 위까지 테트리스에 완성하면 뿌듯하기도 했다. 키 작고 왜소한 편인 내가 주변 남자들에 뒤지지 않게 물건도 잘 옮기는 것 같아서 자신감도 붙었다. 시계를 보기 전까지는. 난 그래도 다섯 시간쯤은 일한 줄 알고 왜 쉬는 시간을 안 주지? 생각하던 차였다. 그때가 아직 4시간도 안 됐을 때였고, 얼마 뒤에야 30분을 쉬게 해 주더라. 앞으로도 3시간이 남은 상황이었다.


같이 온 남자친구라도 만나야 도망을 갔을 텐데

휴게실에 가니 이건 거의 뭐 피난민 캠프 수준. 땀 냄새가 가득한 그곳에서 다들 미친 사람들처럼 물을 마시며 뭐든 주워 먹고 있었다. 업무가 나뉘어서 먼저 쉬고 간 남자친구가 급히 털어먹은 견과류 봉지가 가방 속에 나뒹굴길래 너털웃음이 났다. 난 뭘 먹을 생각은 들지 않아 물과 커피 몇 모금을 마셨다. 뻐근한 발목과 손목, 허리를 열심히 돌리며 어떻게든 다치지 말고 버텨보자 다짐했다.


그나마 같은 컨베이어벨트에 있던 경력자 분이 잘 챙겨주셔서 수월하게 일할 수 있었다. 일하는 중간중간 잊지 말고 물 먹으라고 챙겨주시고, 사탕 같은 것도 쥐어주었다. 잘 버티고 있다고 응원도 해주고 평소보다 힘든 날이라는 얘기도 해주어서 힘이 났다. 다른 한 분은 나처럼 오늘이 첫 쿠팡인 남자분이었는데 두 시간쯤 지났을 때 '이 일 다시 올 수 있을 것 같아요?' 묻길래 그때까진 꽤 할 만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아직 괜찮은 것 같은데요?'라는 망언을 하기도 했다. 끝날 때쯤 그분께 '아까 한 말은 취소'라고 말하며 같이 웃었다.


체력 바닥인 사람도 할 수는 있어요,
다치지만 말아요

난 체력도 근력도 하위 10%에 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나름 할 만했다. 마지막 1시간 정도는 허리가 끊어지는 기분이었는데 하루 자고 나니 온몸이 심하게 아프고 멍 투성이이긴 해도 어디가 잘못됐다! 싶은 느낌은 없다. 평생 무거운 걸 번쩍번쩍 들어본 적이 없는데도 거기서는 약한 척할 수 없으니 머리 위로 쌀 포대를 들어 올리게 되더라. 몇 시간 하고 나면 힘들긴 해도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조심히 잘 끝내보자는 마음이 더 들었다. 극기 훈련을 통과한 기분이었다.


현장은 위험해 보이는 것 투성이었다. 무거운 건 2인 1조로 들라고 되어있었지만 그럴 수 있는 환경이 전혀 아니었고, 꽉 찬 카트를 이동하는 것도 무조건 한 명이 끌고 갈 수밖에 없는데 너무 위험해 보였다. 카트에서 물건이 무너지지 않게 하는 천막도 아예 없는 경우가 허다했고 있어도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다. 카트의 바닥이 잘 고정되지 않는 고장 난 카트도 많았고 쇠가 녹슬고 튀어나와서 카트끼리 서로 얽혀 끌려오는 상황도 많았다. 카트 안에 팔을 넣어 물건을 정리하다가 옆에서 카트가 밀려와 팔이 부러질 뻔하는 상황도 있었다.


몸이 힘든 것보다 체력이 점점 바닥나며 집중력도 떨어질 때의 부상 위험이 더 무서웠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하루 쿠팡에 다녀왔다가 몸이 다치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이 또 있을까. 관리자들은 사람들의 부상 위험보다 당장 물량을 빼는 게 급선무였다. 업무 속도를 채찍질하는 관리자의 반의 반이라도 안전 담당자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 정도의 격무에 비해 최저시급에 가까운 지급액이 너무 적다고도 생각했다. 페이가 낮은 건 아마 접근성이 좋고 원할 때 일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겠지만 사람의 노동력을 너무 폄하해서 측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업의 현장을 체험한다는 것

다양한 업무를 돌며 나보다 더 고생한 남자친구는 끝나자마자 '불로소득을 찾아야겠다'라고 외쳤다. 나도 목장갑을 벗어던지며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면접에 어떻게든 붙어야겠다'였다. 내가 평소 하는 일이 쉽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쿠팡 일용직의 물리적인 어려움보다는 편하게 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앉고 서는 것조차 힘들 만큼 근육통에 시달리는데 점점 뿌듯함이 커졌다. 생각할수록 내가 그 무거운걸 다 들어서 옮겼다는 게 대견하고 7시간의 중노동을 하고도 살아남았다는 게 신기했다. '자려고 누웠을 때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을 행복의 지표라고 한다면, 육체노동은 아마 가장 적절한 생계유지 수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은 온몸이 아파서 잠이 잘 안 올 정도지만, 하다 보면 신체는 적응이 될 터. 퇴근과 동시에 다시는 업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건 꽤 산뜻한 일이었다.


나는 체험하는 기분으로 가봤지만 현장에는 쿠팡 일을 생계로 삼는 분들이 가득했다. 그분들에게 누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더더욱 온 힘을 다해 물건을 쌓았다. 나이, 성별과 상관없이 매일 쌀 포대가 머리 위를 오가는 현장에서 몇 시간이고 땀을 흘리는 분들이 세상에 이렇게나 많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우리는 대부분 노동자이고 모든 노동에는 치열함이 있다. 생계 수단으로써의 모든 일은 그것이 사무직이든 현장직이든 땀방울이 맺혀있다. 사무실에서만 일하던 이는 현장의 무더위와 고단함을 잊기도 하고 현장에만 있던 사람은 사무실의 보이지 않는 경쟁과 스트레스를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무실도 현장도 결국은 같은 치열함으로 이어져있다. 쿠팡 알바는 그 치열함을 몸소 느껴볼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그래, 우리는 모두 이렇게 힘들게 먹고살고 있지. 안전장치도 없는 중노동에 1만 원의 최저 시급을 주는 쿠팡의 '일 할 수 있음에 감사하라'는 표어에는 공감할 수 없지만, 일하는 모든 이에 대한 경외가 새롭게 마음에 채워졌다.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신입에게 포도당 캔디를 건네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어떤 자리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현장이 끝없이 돌아가고 있음을 기억할 수 있기를. 언젠가 나의 치열함이 흐릿해질 때 쿠팡을 다녀와야겠다. 당장 면접에서 떨어져도 가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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