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먹고' 사는 문제임을 잊지 않기
한번 업무 스트레스로 잃은 점심 입맛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대충 편의점에서 해결하고 싶었지만 내 입맛은 또 쓸데없이 까다로웠다. 샌드위치도 도시락도 편의점의 모든 간편식이 너무 달았다.
새로 입사한 회사에서도 저녁까지 쫄쫄 굶는 것을 보다 못한 남자친구가 도시락을 싸주겠다 제안했다. 처음에는 들고 다니기도 설거지하기도 다 귀찮다는 생각에 거절했지만 점차 기력이 떨어지는 기분이 들어 이래선 안 되겠다 생각이 들었다. 살기 위해 점심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닐 때의 가장 귀여운 재미는 내가 오늘 점심에 뭘 먹을지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이다. 점심 메뉴란 대부분 오전 업무를 우다다 처리하다가 분노에 찬 상태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음식을 먹게 되기 마련인데, 도시락을 싸 오면 이미 운명처럼 메뉴가 정해져 있다.
그 메뉴를 생각하며 오전을 버틴다. 한 시간만 지나면 바싹 구워온 스팸에 햇반 따끈하게 데워 먹을 수 있다! 같은 생각을 하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도시락 메뉴는 스팸&밥, 그리고 푸실리 냉파스타다. 전자레인지에 음식 데워먹는 걸 싫어해서 냉장고에서 바로 꺼내 먹을 수 있는 냉파스타를 다양하게 해 먹었다. 원래도 좋아하는 스팸은 점심에 입맛 없을 때도 특효약이다. 둘 다 도시락을 싸고 한참 뒤에 먹어도 맛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게 가장 좋은 점이다.
입맛 때문에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지만 그보다 더 득을 본 건 밥값이었다. 나가서 먹을 때는 점심 한 끼 1만 원 이상에 커피까지 사 먹으면 거의 만 오천 원을 점심에 써야 한다. 일주일에만 7만 5천 원, 한 달이면 30만 원 이상이다. 도시락을 싸 오면 일단 밖에 나가지 않으니 커피도 직접 내려마시게 되고, 그러다 보니 퇴근할 때까지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은 날이 많아졌다.
또 하나의 매력은 시간. 점심 한 시간은 어디 나가서 음식을 시키고 기다려서 먹고 오는 데에는 빠듯한 시간이다. 하지만 자리에 앉아 도시락을 꺼내 먹고 커피를 내려먹으면 아무리 늦어도 40분이면 다 먹는다. 내가 먹는 속도가 정말 느린데도 도시락에 드립커피를 내려 먹고 산책이라도 10분 하고 오기에 시간이 넉넉했다.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를 싸 온 날은 먹으면서 책을 읽기도 하는데 기분 회복에 꽤 도움이 되었다.
이 모든 좋은 점을 차치하고도 도시락을 쌀 수 없는 경우가 당연히 있다. 요리를 할 수 있는지가 가장 큰 문제. 도시락은 아침이나 저녁에 시간을 내서 만들어야 하는 만큼 제한된 시간과 재료로 빨리 만들어야 한다. 차승원처럼 손맛 나는 사람이 아니면 맛없는 점심을 싸가게 되는데 그럼 분명 내가 직접 싸왔는데도 먹기가 싫어진다.
나는 요리를 못하기로 유명하고, 요리를 잘하는 남자친구에게 도시락을 부탁하는 편법을 부렸으니 이 부분에서는 할 말이 없다. 가끔 직접 도시락을 싸보기도 했는데 분명 아침에는 콧노래 부르며 즐겁게 쌌지만 점심에 뚜껑을 열면 다시 닫고 싶은 비주얼이 되었다.
일단 요리 솜씨가 있다면 점심 도시락 여는 일이 즐거워진다. 밖에서는 입맛에 딱 맞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가방 속에 맘에 쏙 드는 메뉴가 들어있는 것이다. 얼른 먹고 어디를 산책할지 생각하는 것도 즐거웠다. 비어있는 사무실에서 여유롭게 도시락 열어서 꼭꼭 씹어 먹고, 내려온 커피를 챙겨 들고 근처 벤치로 나가 책을 조금 읽다 들어오면 숨이 조금 더 잘 쉬어졌다. 그렇게 몇 달을 지내니 쭉쭉 빠졌던 살도 다시 정상 체중으로 돌아왔다.
아침마다 도시락을 잘 닫아서 흔들리지 않게 가방에 넣어 출근하다 보면 일이 먹고 사는 문제라는 것을 잊지 않게 된다. 가끔 일 그 자체에 함몰되어 목적이나 이유를 잊고 스트레스에 갇히게 되는 사람으로서, 도시락을 매일 들고 다니는 것은 그 구덩이에서 조금씩 헤어나오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행복하고 맛있게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꾸준히 생각하는 것. 도시락이 나에게 준 가장 중요한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