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04. 어둠이 어둠으로만 남지 않게
좋은 책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은
생각보다 자주 바뀐다.
어릴 때의 나는
이야기가 재미있는 책을 좋아했다.
끝까지 단숨에 읽히는 책,
읽고 나서 누군가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어지는 책.
그때의 좋은 책은
시간을 잊게 만드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책을 고르는 기준은 조금씩 달라졌다.
이야기가 얼마나 흥미로운지보다
이 문장이 지금의 나에게
어떤 질문을 건네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살다 보면
쉽게 답이 나지 않는 질문들을
마음속에 오래 품게 된다.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이 감정의 이름은 무엇인지,
지금 내가 잘 가고 있는 건지.
그 질문들은 또렷하게 말해지지 못한 채
그저 머물러 있기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우연히 펼친 책 속 한 문장이
그 질문에 조용히 말을 건넨다.
정답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하지만
이상하게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문장.
내가 미처 설명하지 못했던 마음을
대신 말해주는 문장.
그래서 나는
좋은 책을 ‘잘 쓰인 책’이라기보다
‘제때 도착한 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같은 책이라도
어떤 시절에는 아무 의미 없이 지나가고,
어떤 시절에는 단 한 문장으로
마음을 오래 붙잡아두기 때문이다.
어릴 때 좋아했던 책과
지금의 내가 좋아하는 책이 다른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책은 변하지 않았지만
읽는 나는 계속 변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책을 고르는 시간은
단순한 선택의 시간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에 가깝다.
나는 지금 어떤 질문을 안고 있는지,
어떤 답을 기다리고 있는지,
무엇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지.
책장 앞에서 한참을 머무는 동안
그 질문들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결국 손에 들리게 되는 한 권은
내가 고른 것 같지만,
사실은 이미 나를 향해 오고 있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어둠이 어둠으로만 남지 않게 이야기를 전한다.
(나를 소개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 머물던 질문이
조금은 다른 빛으로 보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