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어떤 책을 읽힐까 고민하시나요?
독서교육은 학업의 연장선상에서 학부모님들이 지대한 관심을 쏟는 부분이다. 독서는 창의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위한 학생의 기본 소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자녀의 독서를 위해 심드렁한 아이를 대신해 열성적으로 대출을 대행하는 부모님들이 많다. 간혹 빽빽이 프린트되어있는 추천 도서 목록을 답안지 마냥 쥐고 도서관에 오는 분들도 있다. 초등 추천 도서 목록, 올해의 추천 도서 목록, 인문학 추천 도서 목록 등. 본인이 준비해 온 추천 도서 목록 속의 책이 도서관에 없으면 더없이 아쉬워 하며 다른 목록을 찾아 꼼꼼히 검토하신다. 심지어 빈손으로 돌아서며 다른 도서관으로 향하기도 한다. 과연 내 아이를 알 리 없는 사람이 만든 추천도서 목록은 내 아이를 잘 알고 있는 어머니의 안목보다 더 정확할까?
물론 나도 매년 많은 공을 들여 추천 도서 목록을 만들기에 그 목록의 거룩함을 너무나 잘 안다. 모든 추천 도서 목록은 특정 대상과 목적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을 것이며 훌륭할 것이다. 책을 읽고 싶기는 한데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를 때 전문가의 식견이 가미되어 있는 관심 분야의 추천 도서 목록이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다만 명확히 할 것은 추천 도서 목록을 활용하는 방법이다. 추천 도서 목록의 함정은 개인 맞춤형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추천 도서의 목록을 따라 독서를 시작했다면 그 다음은 자신의 관심과 취향을 반영한 스스로의 선택이 이어져야 독서에 발전이 있을 수 있다.
민성이 어머니는 내가 처음 사서가 되던 해 부터 3년을 성실히 한주도 빠지지 않고 민성이를 대신해 추천 도서목록의 책을 매주 대출해가셨다. 어머니의 대출 이력은 정말 훌륭했다. 교과서 수록 도서, 여름방학 추천 도서, 초등 명작 추천 도서…. 좋다는 책은 다 빌려 가셨다. 당시에는 장서량이 부족해서 1인당 대출 가능한 책이 2권이었다. 추천도서목록의 책만 빌려도 빌려갈 책이 차고 넘쳐서 민성이가 원하는 책은 빌릴 새가 없었다. 초보 사서였던 나는 이 성실함의 끝이 무척 궁금했다.
민성이는 늘 마지못해 끌려온 듯 시큰둥한 얼굴로 방과후에 어머니와 도서관에 들어서곤 했다. 열심히 책을 검색하는 엄마 뒤에서 학습만화나 잡지를 뒤적이다 갈 뿐, 쉬는 시간에 제발로 도서관을 찾는 일은 없었다. 학년이 올라가도 독서에 전혀 흥미가 붙지 않는것 같았다. 어느날 어머니는 민성이가 결국 책을 아예 읽지 않으려 한다며 눈물로 한탄하셨다. 아무리 용돈이나 게임시간으로 보상을 해 준다고 해도 이제 소용이 없다며 더 좋은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하소연 하셨다. 열성적이었던 어머니의 오랜 노력에 비하면 참 초라한 결과였다. 왜일까?
넷플릭스에서 시청할 작품을 고른다고 생각해 보자. 장르로 검색 하고, 리뷰도 보고, 추천 영상도 참고한다. 그렇게 선택한 영화를 감상한 뒤에 별점 5점을 주면, 알고리즘에 반영되어서 다음에는 그 감독의 영화, 그 배우의 영화, 그 장르의 추천영화가 화면에 뜬다. 반면에 아날로그 추천 도서 목록에는 내 자녀의 취향과 수준, 관심사가 반영되어 있지 않으며 당연히 읽은 책에 대한 피드백 역시 없다. 그러니 수많은 추천도서 중에세 나와 맞는 책을 발견했다면 그 다음에는 더 이상 종이에 적힌 추천 도서 목록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그 작가의 다른 책, 그 시리즈의 다른 책, 그 분야의 다른 책을 검색해서 읽으면 된다. 유명하지 않아도 신간이 아니어도 괜찮다.
어제 방문했던 맛집의 음식이 엄청나게 맛있었다면 다음날 만난 지인과 밥을 먹을 때 나도 모르게 그 이야기를 하게 된다. 독서에서도 진짜 즐거움을 경험하고 나면 나도 모르게 주변에 권하기도 하고 비슷한 다른 책을 읽고 싶어지게 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해 가는 과정에서 독서에 재미가 붙게 되는 것이다. 남이 좋다는 것만 끝없이 읽어내는 끈기를 가진 아이는 지금껏 본 적이 없다.
그럼 시청을 시작한 드라마의 1편, 2편이 재미없으면 어떻게 하는가? 안 본다. 그런데 책은 왜 끝까지 다 읽고 독후활동까지 마쳐야만 독서라고 강요하는 걸까? 빵집에서 빵 고르듯, 옷 가게에서 옷 고르듯 책도 내 취향대로 고르고 맛보는 게 중요하다. 만약 의외로 맛이 없으면 그만 먹으면 되고, 의외로 안 예쁘면 안 입으면 된다. 나는 맛있는데 아이는 맛이 없을 수 있고, 너는 예쁜데 나는 안 어울릴 수 있다. 빵은 빵값이 아깝고, 옷은 옷값이 아깝겠지만 책은 돌려주면 그뿐이다. 괜찮다. 수많은 책 중에 몇 권을 반납했을 뿐이다. 지금 들고 있는 추천 도서목록 속의 책은 이곳에 없을지라도 최소 만권이 넘는 맛을 고를 기회가 여기 작은 도서관에 있다.
아이가 아이쇼핑 하듯 직접 서가를 거닐며 구경하게 내버려 두자. 처음엔 실패할 확률이 높겠지만 보물찾기 하듯 간혹 인생책을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스스로의 취향을 알아내는 과정까지 포함해서 독서이다. 이것은 평생을 두고 일궈가는 재미있는 성취이며 그 긴 여정의 출발점이 바로 초등학교 도서관이다.
학교 도서관이라는 곳은 세상의 수많은 책을 다 담아내기엔 참 소박한 규모이다. 그러니 사서는 그 중에서 학생들에게 유용할 법한 책들을 장르별로 골고루 고르고 골라 서가를 살뜰히 채운다. 교육청 교과연계도서, 어린이도서연구회 추천 도서, 학교도서관저널 추천 도서, 학교도서관사서협의회 추천 도서, 책씨앗 올해의 추천 도서, 온라인 서점의 분야별 신간과 어린이 베스트셀러 등을 수시로 훓으며 책을 사냥한다. 그리고 교사와 학부모로 구성된 도서관 심의위원회의 내부 검토를 거쳐 최종 구매에 이른다.
학교도서관에 입성한 책이라면 아무 책이나 잡아도 아무책은 아니라는 말이다. 장담하건데 초등학교 도서관은 길을 잃어도 결코 손해 볼 일이 없는 보물섬이다. 보물지도는 없어도 괜찮다. 우리는 아이들이 거리낌 없이 보물섬에 발을 내딛을 수 있도록 응원하기만 하면 된다. 혹시 민성이 어머니가 매주 자신을 위한 책을 3년간 대출해서 열심히 읽었다면 곁에서 구경하던 민성이의 초등독서는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