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는 만년 꼴찌

사서번역기 사용법

by 느닷

귀욤뽀짝한 1학년 영찬이가 쉬는 시간에 다짜고짜 도서관에 컴플레인을 걸어왔다.

"선생님이 도서관에서 읽어주는 그림책이 재미있기는 한데요…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어요~ 저는 포켓몬을 엄청 좋아해서 포켓몬 책만 보는데 여기는 포켓몬 책이 한 권도 없더라고요. 그게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책인데 왜 없어요? 저는 집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4번이나 봤고 넷플릭스에 나오는 만화도 모두 다 봤기 때문에 얼마나 재미있는지 확실하게 알아요. 포켓몬에 대해서는 내가 뭐든지 다 설명해 줄 수 있어요!"


불만인지 자랑인지 아리송한 소리를 또박또박 늘어놓고는 어깨를 으쓱이는 귀여운 녀석의 말에 얼른 사서 번역기를 돌렸다. 도서관에 만화책이 없어서 읽을 만한 책을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영찬이는 포켓몬 전문가겠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와~ 포켓몬은 동물인가?"

"당연하죠~!"

"그럼 영찬이는 동물에 대해서도 잘 알겠네?"

"동물도 조금… 알기는 하죠…."

"음~ 좋아. 도서관에 포켓몬 만화책이 없어서 아쉽겠지만 영찬이는 이미 포켓몬 전문가니까 집에 있는 책으로도 충분할 거야. 대신 도서관에는 동물책이 많아요~ 그러니까 동물책을 포켓몬 책처럼 많이 읽으면 포켓몬이라는 동물에 대해서 더 전문가가 될 수 있겠다! 어때?"

"오~ 좋아요!!"

"이리 와봐. 여기가 동물에 관한 책을 모아놓은 곳이야. 이제부터 영찬이는 1학년 2반 동물 분야 담당 전문가인 거야. 여기 있는 동물책을 모두 읽고 동물에 대해 궁금해하는 친구들에게 안내해 주는 거지. 포켓몬을 설명해 주듯이. 할 수 있을까?"

"당연하죠. 어? 와~ 그런데 오늘은 이 미생물 책 먼저 볼래요!"

다행히 통역에 성공했다. 저학년일 수록 사서 번역기가 잘 먹힌다.


1, 2학년은 보통 글이 적은 그림책 서가를 서성이는데 영찬이는 요즘 400순수과학 서가 앞에 죽치고 앉아있다. 얼마나 저러고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포켓몬을 사랑하는 크기만큼 그곳에 앉아 있지 않을까? 영찬이는 점심시간마다 친구들에게 멸종동물에 대한 책을 소개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역시 한 우물 파 본 놈이 딴 우물도 잘 판다.


나는 만화책과 학습만화책을 수서목록에 잘 넣지 않는다. 그나마 몇 안되는 학습만화는 모두 복도에 비치도서로 정리되어 있어서 대출을 해 갈 수 없다. 복도에서만 볼 수 있는 이 학습만화들은 스마트폰 게이머들의 플레이가 지루해 질 때쯤 그들을 유혹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다.


독서는 내용을 기억하고 종합하고 추리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두뇌를 적극적으로 풀가동하며 집중해야 도파민이라는 행복호르몬을 보상으로 얻을 수 있는 노동이다. 독서는 생각보다 진입장벽이 높은 고차원적 행위라는 뜻이다. 그러니 양질의 독서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직관적인 만화에 밀릴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보다 더 쉬운것이 TV이다. 소리내서 읽어주는 데다가 영상으로 상세히 설명해 주니 상상하고 추리할 필요가 없다. 뇌가 푸욱 쉬면서 구경만 해도 도파민이 시청자를 즐겁게 해 준다. 그리고 이에 대적할 만한 것이 바로 유튜브 쇼츠와 게임이다. 짧게 요약해서 들려주고, 보여주고, 대신 상상해주고, 알고리즘은 다음 선택까지 대신 해 준다. 뇌에 전달되는 단편적인 정보를 소비하기만 해도 도파민이 분출된다. 길고 긴 내용을 기억하고 이해하는 따위의 노동을 하지 않아도 아드레날린이 분단위로 뿜어져 나와 시청 의욕을 끌어올린다. 스마트폰 속 쇼츠와 게임은 이 구역 최강자다.


혹시 넷플릭스를 밤새 정주행 하고난 다음날 새벽이나, 나도 모르게 쇼츠를 몇시간 동안 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몰려드는 공허함을 경험 해 본 적이 있는가? 뇌 전문가들은 뇌가 편안한 만큼 행복의 질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사실을 아이들이 이해 할 리가 없다. 이해하고 있는 어른도 스마트폰의 강력한 유혹을 거부하는것은 쉽지 않다. 그러니 냉혹한 도파민 피라미드에서 만년꼴찌를 차지하는 독서를 지켜내려면 나는 꼼수를 쓸 수 밖에 없다. 아이들이 독서세상에 안정적으로 한발 걸칠 때 까지만이라도 만화, TV, 휴대폰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꼼수 말이다.


디지털 세상의 거대한 변화 속에서 내 꼼수는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불공정한 경쟁이라고 태클을 걸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사서번역기를 돌려가며 독서의 기적적인 꼴치탈출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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