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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닷 Apr 10. 2023

3-6 오영식의 결혼생각

ㅣ 학생인권

아이들 대부분이 하교한 조용한 오후. 밀린 업무에 집중해 보려고 진한 커피 한잔을 들이키며 피로를 쫒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마지막 방과 후 수업을 기다리며 서가를 어슬렁거리던 3학년 6반 오영식이 내게 다가오더니 뜬금없이 자신의 비혼주의를 설파했다. 정말 앞뒤 맥락 없이 "선생님 저는 결혼은 절대 안 할 거예요." 라며 다짐하는 소리에 커피를 뿜을 뻔했다. 


항상 눈에 띄게 세련된 옷매무새를 하고 다니며, 여학생들에게 고백을 9번이나 받았었다고 자랑하던 오영식이가. 여자친구에게 오렌지맛 막대사탕을 선물로 사주느라 귀찮았다고 어깨를 으쓱이던 오영식이가 결혼은 절대 안한댄다. 아니 왜? 왜? 도대체? 왜?


"선생님도 참... 노는 게 중요하니까요~! 저는 아직 초등학생이니까 놀 수 있지만 어른이 되면 1도 놀 수 없잖아요. 지금도 공부 때문에 많이 못 노는데 어른이 돼서 결혼을 하면 진짜 전혀 놀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결혼을 안 해야 놀 수 있는 거예요. 잘 들어보세요. 결혼해서 애가 생기잖아요? 그럼 하루종일 가족들이 쓸 돈을 벌려고 일하느라 힘들 텐데 밤에 늦게 돌아와도 애들을 돌봐줘야 해요. 부인 눈치를 안 보려면 요리나 설거지 같은 일도 많이 해야 돼요. 주말에도 못 노는 건 똑같아요. 애들이랑 놀아주고 아내를 도와줘야 하거든요."


무슨 영화 대사 읊듯이 유부남이 놀 수 없는 현실에 대해 줄줄이 말하는데 입이 떡 벌어졌다. 영식이 아버지는 삶의 고단함을 영식이에게 넋두리하는가 보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다. 

"영식아... 네 주변에 누가 그렇게 놀지도 못하고 힘들어하는데~?"

오영식은 답답하다는 듯이 자신의 아빠를 포함해서, 자기가 아는 어른 남자는 다 그렇게 산다며 가슴을 친다. 더 웃긴 건 영식이 친구 녀석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며 맞장구를 치는 것이다. 

"맞아요! 진짜예요~ 우리 아빠도 맨날 일하고 맨날 쓰레기도 버려야 되고, 맨날 아기도 돌봐야 해서 엄청 엄청 힘들대요, 근데 맨날 돈도 없고 그래서 저랑은 놀아줄 시간도 없대요. 저도 결혼은 절대 안 할 거예요"


대한민국의 결혼율과 출산율이 뚝뚝 떨어지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지금 이야기 속에 아이들은 무려 초등학교 3.학.년.이다! 저 어린아이들이 보기에 자신들의 미래가 저렇게 척박하다는 것이다. 요 똑똑한 녀석들이 비혼이라는 치트키로 암울한 미래를 건너뛰려는 전략을 일찍부터 세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평소에 아이들이 부모에게서 받는 에너지가 어떤 결인지 느껴져서 마음이 아파왔다. 특히 영식이는 늘 좋은 옷을 잘 차려입고 반짝거리며 다녀서 더 의외였다. 얼마 전 지인을 통해서 들었던 유치원 선생님의 일화가 떠올랐다. 맞벌이 부부가 키우는 여자 아이가 집에서 저녁마다 일어나는 일을 담임 선생님에게 전했다. 

"저녁밥을 다 먹고 나면 엄마, 아빠는 매일 가위바위보를 해요. 이긴 사람은 나가 놀거나 하고 싶은 걸 하고, 진 사람은 설거지랑 집안일을 하면서 저랑 동생도 돌봐줘야 하는 거예요."

여기까지 들었을 땐 정말 별 느낌 없이 젊은 부부가 즐겁게 사네~ 신선하네~ 정도로 이해했다.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를 하는데 이긴 사람은 엄청 좋아 하지만 진 사람은 항상 실망해요. 지는 사람이 우리를 돌봐줘야 하니까 저는 엄마, 아빠가 가위바위보를 할 때 슬퍼요."

아뿔싸... 자신을 돌봐주는 일이 싫어서 밤마다 자신 앞에서 내기를 하는 부모. 그 모습을 매일 바라보며 자신을 영원히 짐으로 밖에 느낄수 없는 아이. 이 이야기를 하는 여자 아이는 매사에 심하게 눈치를 보는 소심한 성격이라고 했다. 부모님에게 가위바위보를 그만하시라고 말하는 게 어떻겠냐는 유치원 담임교사의 조언에 아이는 이렇게 답했다. 

"안돼요. 엄마, 아빠가 속상해할까 봐 말 못 해요. 엄마 아빠는 너무 피곤해서 그러는 거예요." 

아이는 고작 7살이었다. 






요즘 출판되는 성장소설중에 가정 내 언어폭력에 대한 내용을 담은 책이 많이 출판되고 있다. '가짜모범생', '스타피시', '너 그때 왜 울었어?' 등. 읽을 때마다 부모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가 있나! 싶은 생각에 화가 났었지만 지금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 역시 부지불식간에 아이들 앞에서 '나'만의 입장에서 함부로 말하는 순간들이 있었던 것 같다. 


'언어폭력'이란 것이 특별난 게 아니다. 함께 있는 누군가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에 실려 날아가는 말들이 상대방 입장에서는 다 폭력적이 될 수 있다. 특히 부모의 말과 행동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걸러짐 없이 아이들에게 오롯이 심겨진다. 그러니 이런 실수를 피하려면 우리는 아이들을 온전히 한 인격체로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 방법밖에 없다. 어른의 짐이 아무리 버거워도 그것을 하필 사랑하는 내 아이에게 함부로 뇌까려서는 안 된다. 부디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가 덜 피곤하고, 덜 바쁘고,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보기에 부부의 삶이 여유롭고 좋아 보인다면 3학년 6반 오영식과 그 친구도 어린 날 자신들의 결정을 비웃으며 결혼을 하고싶어졌다고 말하게 되지 않을까?





* 학생 이름은 가명입니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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