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시작하다

공부할 줄 몰라서

by 지구대장

목 차

프롤로그

00 아무도 물어보지 않아서 나에 대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01 퇴사하면 하고 싶었던 것들

02 비로소 보이는 것들

03 돈 버는 것 빼고 다 해보기

04 1년만 살아보자

05 걷기를 시작하다

06 계단을 오르다

07 공부를 시작하다

08 스쿼트를 시작하다

09 운동하고 싶어지는 그림을 그리다

에필로그


공부를 시작하다


멈추었던 내 일상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냥 걸었을 뿐인데.


멈췄다고 생각했던 내 일상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매일 일어나자마자 시작하는 걷기에 '운동'을 붙여서 '걷기 운동'이라 말하고 다닐 정도로 꾸준히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덧 계단도 오르게 됐고, 계단을 매일 오르게 됐다.


걷고, 계단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살아지기 시작했다.


계단을 오르면 오를수록 나는 내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멋지다고 생각한 그 이유는 일단 매일 나처럼 계단을 20층씩 오르는 사람이 내 주변에 없었다. 저 멀리 온라인에서라면 있을지 몰라도.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남편밖에 없었지만, 아무튼 가장 가까운 내 곁에 계단 오르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 덕분에, 20층을 매일 오르는 사람이라는 독보적 존재감으로 매일 하루를 살았다.


그런데 나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걸까? 멋지다고 느낄 때마다 자긍심이 생기는 내가 궁금해졌다. 지금은 멋지다고 느끼지만 금세 아무것도 아닌 하찮다고 느낄 때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하찮고 멋지고, 어쩌고 저쩌고 간에 멋진 일을 많이 하면 멋진 사람이 되어가는 걸까. 하찮다고 느껴지는 마음은 왜 그런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나란 인간에 대한 생각을 이어나갔다. 걷기전에는 전혀 해본 적 없는 물음과 생각이었다.


매일걷고 매일계단을 오를수록 나는 나에 대해 많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그랬기때문에 해본적 없는 나에 대한 생각들이 계속 들었던 것 같다.


조용한데 산만하고, 말이 많은데 참고 있고, 주변을 많이 보고 싶어서 여기저기 정신을 쏟느라 바로 눈앞의 턱을 잘 못 보기도 하고, 혼잣말이 늘었고, 한 문제를 두고 수십 번씩 생각이 바뀌기도 하고... 나는 그렇게 낯선 사람을 알아가듯 스스로를 관찰해가고 있었다.


걷고 계단을 오르면 땀이 났다. 걸을 때 보다 계단을 오르면 땀이 더 많이 났다. 땀을 많이 생산해낼수록 마음속 썩은 생각도 이 땀과 함께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집에서는 큰 고민이었던 것이 나와서 생각하면 별것 아니었고, 어둡고 막막해서 탈출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생각들은 햇빛을 좀 쬐면 쉽게 날려먹을 수 있었다.


땀을 생산해낼수록 쳐다도 보기 싫어지던 일을 다시 시작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시작했다. 쳐다도 보기 싫었던 일 중에는 도중에 그만두고 나왔던 회사일이 먼저 생각났고, 그다음은 멈춰버린 그 회사 일을 내 개인적인 프로젝트로 풀어볼 수 없을까 하는 괜한 생각도 들게 했다.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는 생각, 이뤄보고 싶은 마음, 시작한다는 설렘이 좋았다. 퇴사한 이후로 하고 싶은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걷다보니 나는 뭔가를 다시 시작해보고싶어서 무엇부터 시작해볼지 골몰하기 시작했다.


뭐든 이뤄보고 싶고, 뭐든 시도해보고 싶은 이 마음을 붙들고 싶어 졌다. 놓았던 공부를 다시 시작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사회생활을 웹디자이너로 시작했던 나는, 사실은 웹디자인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취업을 했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규모가 매우 매우 작은 곳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취업준비 학원들이 내세우는 취업 합격생의 포트폴리오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는 포트폴리오를 만들어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해서 내가 할 줄 아는 장끼들을 엮은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그 포트폴리오를 보고 내게 함께 일해보자고 제안을 넣어준 회사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으로 가서 일을 시작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웹디자이너로 취업했을 때, 나도 신기했다. 사실은 디자이너로서 자질이 없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툴을 조금 다룰 줄 안다는 것 하나로 '웹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달았으니 스스로도 의아했었다. 웹디자이너로 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포토샵을 중학교 때부터 다룰 줄 알았고, 대학교 다닐 때 함께 살던 친구에게 일러스트레이터를 배웠던 덕분이었다.


취업은 했지만, 돈은 벌고 먹고 살수 있게됐지만, 월급은 오르지 않았다.


이곳, 저곳을 다녀도 내 경력을 온전히 셈하여 인정해주고 그만큼의 월급을 주는 회사는 없는 것 같았다.


오르지 않는 월급을 신세 한탄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날에는 결심을 굳혔다. 신분 상승을 해보기로 작정했다. 웹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고, 연봉을 높이려면 디자인 보다는 개발 지식이 더 필요해 보였다.


HTML, CSS, JAVASCRIPT. 여전히 내가 사랑하지만 현실에서는 더 많은 것이 필요했다. 커리어를 확장시키기로 작정했을 때, 디자이너로서 일을 그만두고 국비지원 개발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열심히 배웠지만 학원을 수료한 뒤에도 내가 배운 게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몰라 난감하기만 했다. 어렵게 다시 취업해서 회사를 다니면서도 모자란 공부와 비전공자라는 꼬리표를 떼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밤에는 열심히 공부했다. 어렵게 소프트 공학사를 취득했던 그 날로.. 나는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다시 출발선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낯설지 않은 기분이다. 나는 자주 출발선에 서 있는 기분을 느껴왔다. 무언가 해결하면 다시 또 다른 출발 선위에 세워지고, 그것이 끝나면 또 다른 출발 선위에 세워졌다.


내가 서있고 싶었던 출발 선위에 다시 서고 싶었다. 그 선 위에서라면 자신 있었다. 잘할 자신은 없지만 열심히 할 자신은 있었다. 진짜 개발자가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던 순간을 떠올렸다.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시기는 아주 가끔이었지만, 이 가끔 느낄 수 있는 감정에 조금씩 젖어들고 있었다. 나는 진짜가 되고 싶다. 나는 멋진 인간이 되고 싶다. 공부를 다시 하고 싶다.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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