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층에 살아요.
00 아무도 물어보지 않아서 나에 대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2분 30초 남았다.
아무렇게나 걷기를 시작한 이후에 하나씩 규칙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오늘은 이쪽 길로 걷기, 내일은 저쪽 길로 걷기, 라던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걷기, 배와 똥꼬에 힘주고 걷기, 길을 건널 때는 사방을 주의 깊게 살피기, 하는 것들. 오늘은 조금 더 멀리 가볼까 하는 것들도.
걷기를 시작한 이후에 이 주변 식물과 동물에 대해 흥미도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풀과 나무와 생전 쳐다도 보지 않던 꽃들과 갑자기 나타나서 놀리키는 꿩,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것 같은 까치, 날갯짓이 아름다운 까마귀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좋아지기 시작하니까 자주 보고 싶어 졌고, 눈만 뜨면 일단 옷을 주섬주섬 입고 집을 뛰쳐나오다시피 했다. 그렇게 하루 일과가 시작되었다.
걸을 때, 규칙이 하나씩 생기기 시작했을 무렵 얼마나 걷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어서 쉬운 방식을 선택했다. 걷는 양을 시간으로, 단순하게 한 시간으로, 했다. 정해놓고 보니 한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조금 줄이고 싶어 지기도 했지만, 약속을 한 이상 지키고 싶다는 결의 같은 게 생겨버려서 줄이지는 않고, 대신 다른 활동을 하나 추가해보기로 했다. 더 큰 자극이 필요했다. 운동량을 늘리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20층짜리 아파트였는데, 그곳 10층에 살고 있었다. 아파트에 사는 것도 처음이고, 이렇게 높은 층도 처음이었다. 무엇이든 간에 처음일 때는 나중에 생각해보면 간단한 것인데도, 왜 그 생각을 못했지, 하는 것들이 많다. 계단도 그랬다.
아파트에 사는 게 처음이라서, 처음부터 계단을 떠올리는 게 내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계단을 오른다는 게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고, 계단을 떠올렸을 때는 왜 계단 생각을 못했지? 라며 의아해졌다. 그렇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건물은 20층이지만 우리 집이 있는 10층까지 올라가기로.
계단 오르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지만 1층에서 매일 마음을 먹어야 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었다. 바로 옆에 쉬운 유혹까지 있는 마당에 매일 마음먹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다. 쉬운 유혹은 엘리베이터였다.
버튼만 누르고 기다리면 되는 쉬운 일이, 마음을 먹어야 겨우 할 수 있는 일 바로 옆에 있는데, 굳이 힘들여서 무릎과 다리를 써가면서 올라야 될 이유가 뭐가 있을까?
계단과 엘리베이터로 10층을 동시에 오른다고 했을 때, 계단은 시간상으로도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바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사치스러운 일일지도 몰랐다. 하는 일 없는 나 같은 사람은 조금 오래 걸리고 귀찮은 일을 선택할 때도 있다. 나는 내 시간의 주인이었으므로 시간을 마음껏 탕진해보는 일을 해보기로 했다.
계단 오르기를 멋지게 해내던 사람들을 TV에서 보면서, 나도 도전해보고 싶다고 느꼈던 어릴 적의 파묻힌 기억까지 끄집어내어 동기로 삼았다. 그토록 원하던 계단 오르기를 드디어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계단을 오르기를 시작했다.
우리 집이 있는 10층까지만 오른다고 마음먹었는데, 사실은 4층부터 지겹기 시작했다. 4층 이상의 계단을 이용해 본적의 거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곳에 이사 오기 직전에 살았던 면목동 옥탑방의 높이도 3층 건물에 있던 옥탑방이었기 때문에 4층이라고 볼 수 있었다. 또, 그 직전에 살았던 염리동 옥탑방은 2층짜리 건물 위에 있던 옥탑방이었으므로 3층이라고 할 수 있었다. 10층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높은 곳에서 살고 있었음을 뜻했다. 이런 기회를 매일매일 날려 먹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지루한 마음은 삽시간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뀌었다. 이사 온 이후로부터 매일매일 하지 못했던 그 하루들이 아까워져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느낌까지 들었다.
계단 오르기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1시간 동안은 꼬박 걷기를 하고, 그 이후에 계단을 올랐으나 걷기와 계단 오르기를 합쳐서 1시간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환경에서는 꾀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충분하다는 마음의 설득에 따라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랬는데, 그날은 10층까지 다 올라왔는데도 2분 30초가 남았다.
' 2분 30초.. 얼마 안 남았는데, 더 올라가 볼까. '
한 계단씩 디딛을 때마다 나는 괜히 조마조마해졌다.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지르면 안 되는 일이라도 저지르는 것 같았다. 10층 사는 사람이 11층, 12층 이렇게 계속 올라가도 되는 건지, 하는 생각에 13층쯤에서 다시 시계를 봤다. 이번에는 1분 30초가 남았다. 조마조마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시간이 후딱 갔을 줄 알았는데, 남아 있는 시간을 보면서 왜 아직도 시간이 남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내 생각보다 빨리 올라왔구나.'
더 올라보기로 했다.
17층에 다다라서야 1시간을 채울 수 있었다. 17층까지 올랐는데도 내 허벅지가 당기거나 아프거나 그런 증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숨이 살짝 차오르긴 해도.. 내 허벅지는 기대 이상으로 튼튼했다. 얼마 전 자전거를 타고 집에서 25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서 캠핑을 하고 온 다음날에도 아무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음이 다시 조급해져서 17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있어야 될 곳이 아닌 곳에 온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허벅지를 만져보았다. 말캉한 피부 안쪽으로 단단한 것이 느껴졌다. 단단한 마음은 혹시 허벅지에서 생기는 건 아닐까, 좀 더 단단해지고 싶은 생각에 내일은 더 높은 곳에 올라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 높이 올라가 봐야지, 어떻게 되나 보자, 하는 그런 맞서 싸운고 싶은 생각.
다음날 집 주변을 걷고 다시 계단을 오르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어제보다 조금 비장해졌다. 어제 17층까지 올랐는데, 오늘 아무렇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이 더욱 중요한 날이 되었다. 17층 보다는 높이 올라가야 했다. 누군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할 때는 사명감이 높아진다. 나는 인류는 구하지 못하지만 나 자신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라도 생긴 양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4층부터는 지루하게 느껴지곤 했지만 오늘만큼은 10층까지 단숨에 올랐다. 내 한계라고 생각했던 10층을 나는 아주 간단히 깨부수어버렸기 때문이다. 고작 2분 30초가 남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랬기 때문에 오늘은 다시 17층 보다 내가 높이 올라갈 수 있는지 없는지 궁금해졌다.
1층에서 계단을 오르기 전에 찍어두었던 시간을 확인해보니 5분이 지나있었다. 5분 만에 20층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내 허벅지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았다. 두 손으로 뺨과 어깨와 허리, 엉덩이, 허벅지를 만져봤다. 괜히 그러고 싶었다.
내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하나가 들어왔다.
'나는 내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