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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란 Oct 17. 2023

그래서 삶은, 라면

끓어오르거나 부서져버릴지라도.


주 5일제가 시행되기 전인 1990년대에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수업이 있었다. 당시 나는 토요일 4교시가 되면 심장이 빨리 뛰었다. 토요일은 급식을 하지 않고 일찍 하교하는 날이자, 일주일 중 가장 설레는 날이었다. 오전 수업만 마치면 된다는 사실과 15분 남짓 걷는 동안 주말에 뭐 할 건지 친구들과 소소한 계획을 공유하는 재미, 곧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친구들과 헤어지며 들어서는 고독한 현관의 느긋함, 그리고 '긴급출동 911', '레니게이드'등 토요일 오후에만 방영하는 외국 방송물을 보며 라면을 끓여 먹는 일-은 오직 토요일에만 주어지는 즐거움이었다. 그 시간은 오늘까지 마쳐야 하는 숙제도, 내일 반드시 챙겨야 하는 준비물도 없었다. 편한 실내복 차림으로 라면이 담긴 냄비와 뚜껑, 그리고 젓가락만 있으면 충분했다. 쟁반에 모두 담아 거실 바닥에 놓으면 완성되는 한 봉지의 자유는, 벌겋게 달아오른 냄비처럼 뜨거웠고, 피어오르는 김처럼 펄럭거렸다.



토요일의 라면을 애정하게 된 후로 주변의 사물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냄비를 보면 가장 먼저 라면을 떠올렸다. 나에게 냄비는 라면을 끓이기 위해 만들어진 발명품이었다. 냄비를 닮은 물건이나 그림을 보면 자연스럽게 라면이 먹고 싶어졌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목욕탕 건물을 두 차례 마주치는데 건물에 새겨진 심벌(♨)은 본래 온탕을 의미하지만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피구왕 통키를 떠올리더니 매운맛을 안 후부터 갓 끓인 '라면'으로 정착했다. 연상 작용은 유튜브의 알고리즘처럼 내가 익숙한 것들을 끌어 사물을 정의한다. 한자를 잘 모르는 아이들이 신라면을 ‘푸’라면으로 읽고, 초코파이의 정을 아홉으로 읽는 것처럼, 아는 만큼 보이고 좋아하는 만큼 기억을 재생한다. 지금은 화가 난 사람의 심리를 표현하는 이모티콘으로 쓰이는 듯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월이 지나도, 영상 앱의 알고리즘이 굵은 썸네일이 가득한 영상을 골라 눈앞까지 갖다 줘도, 나는 굳건히 라면을 떠올린다. 내가 알고 있는 뜨거운 것 중 가장 맛있기에, 내 알고리즘의 선택은 늘 라면이다.


출처: 나의 알고리즘


사실 라면은 나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교문을 나와 주택가를 가로질러 걷는 내내 창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라면 냄새를 미루어 짐작컨대, 토요일 오후는 라면을 위한, 라면에 의한, 라면의 시간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일찍 오면 또 뭘 해 먹일까-밥 타령이 지겨운 엄마는 동네 마트에서 세일을 할 때면 놓치지 않고 묶음 라면을 사두었다. 좀처럼 간식거리를 사주지 않던 엄마였지만 라면 앞에서는 관대했다. 그렇다 보니 몰래 꺼내 먹어도 혼나지 않으며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이것이 유일했다. 내가 라면을 끓여 먹고 난 늦은 오후, 토요일이라 일찍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웃었다.

“누가 라면을 맛있게 드셨을까?”

아빠는 급히 환복을 한 뒤 대접만큼 물을 받은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나와 동생은 TV 앞을 왔다 갔다 하며 다음 예능 프로그램이 시작했는지 보초를 서다가 아빠의 면치기를 구경하는 게 더 좋아서 식탁에 자리를 잡았고 그렇게 라면 한 젓가락을 얻어먹고 나면 매콤한 수프 향으로 가득한 토요일은 활활 불타올랐다.



그때만 해도 나는 공부하는 게 제일 지겹고 힘든 줄 알았다. 꽤 부지런하고 공부에 열심이었던 나는, 스스로가 라면의 위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지독한 라면 사랑에도 참고 참다가 토요일 오후에 끓여 먹는 기다림. 그것이 라면을 맛있게 먹을 자격이었다. 그것은 24시간 각종 채소로 우려낸 국물을 사용한 해장국 보다 진했고, 고기나 버섯을 넣어 값비싼 노력으로 끓인 전골보다 깔끔했다. 나는 누구이고 왜 태어났는지-따위의, 알고 싶지 않지만 자꾸만 떠오르는 고민과 온갖 걱정을 한데 집어넣고 일주일을 기다린 TV 프로그램을 보며 먹는 그 맛을 누가 따라 할 수 있을까. 고생했다고, 잠시 내려놓으라고 말하는 듯한 국물을 숟가락에 옮겨 나는 후후 불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나 세상에 둘도 없던 위로의 맛은 주 5일제의 도입으로 조금씩 변질되었고 나는 파스타와 일본식 라멘을 경험하며 온갖 외국어로 된 음식을 찾아다녔다. 금요일 저녁에는 특별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며 유명한 맛집의 대표 음식만 골라 먹기도 했다. 토요일 오후는 전날 저녁부터 이어진 '불금'이 마무리되지 못한 채 배달음식으로 때우던 날들이 많아졌고 토요-라면은 그저 옛날 어릴 때 먹던 추억으로 박제되어 있다가, 이따금 찾아오는 고민들, 예컨대 나는 누구이고 왜 살아야 하는지- 따위의, 또다시 반복되는 걱정을 우려내고 나면 냄비를 꺼냈다. 라면을 끓이는 횟수가 줄어든 만큼 고민도 녹아 없어지길 바라며.



얼마 만이었을까. 팬데믹이 전 세계를 휩쓸고 겨우 찾은 일상 속 어느 토요일 늦은 오후.

엄마가 개인 일정으로 아빠의 저녁 식사를 급하게 부탁한 날. 몸보신용 고기를 사 들고 집에 갔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냄새가 풍겨왔다. 주방에 가보니 아빠가 라면을 끓이고 있던 것. 전봇대처럼 단단했던 아빠는 갑자기 진단받은 질병으로 40번 이상의 항암 치료를 받고 있었다. 엄마는 아빠의 항암 치료 일정에 맞춰 체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단백질과 제철 음식으로 빼곡하게 채운 식단을 챙겼다. 그런 사정으로 다급히 팬을 꺼내 소고기를 요리하려는데 아빠가 하는 말.

"아빠한테 지금 필요한 건 라면이야. 엄마 없을 때 먹을 수 있는 별미라고."


사실은 무척 그리웠던 라면을 차마 엄마 앞에서 먹을 수가 없어서 참고 또 참았다는 아빠 말에 나는 바쁜 손을 멈춰 내려놓았다. 

"나도 라면 먹을래."

다시 면발을 들어 후루룩 먹는 아빠와 냉큼 하나 더 끓여낸 나는, 왜 이리 사는 게 힘드냐고, 그래도 살고 싶다고, 수없이 눈물로 우려낸 말들을 말아, 말없이 국물을 마셨다. 삶은 라면처럼 살고 또 살아도 질리지 않았고 지쳐 포기하고 싶을 때 살아보자고 손을 건넸다. 3년간의 항암을 마치고 '다음 항암 일정은 없음'이라는 소견을 안고 구역감 없는 휴식을 시작하던 날에도 아빠는 가끔 라면을 끓였다. 아픈 것보다 두려운 건 더 이상 끓어오를 수 없는 무기력함이라고, 아빠는 건강하고 젊은 시절에 사랑했던 맛으로 기억을 주무르며 비로소 쉼표의 꼬리를 내렸다. 고달픈 싸움이 다시 시작될지라도 익숙한 맛을 떠올리는 것. 숨은 내 모습 찾기를 이어가는 것. 오늘도 곳간에 라면을 채워 넣는다. 언제든 꺼낼 수 있는 한 봉지의 자유를 숨겨 놓는다. 우리의 삶은 오늘도 끓어오를 준비가 끝났다.





 

고단한 하루를 끝내고 모두가 잠든 시간. 어둠을 헤치고 다급하게 찾아온 허기는 잠과 맞서기 시작한다. 박상영 작가의 책 제목처럼,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속으로 되뇌지만 배고픔을 이기려 할수록 정신은 또렷해진다. 이제 어쩌지. 우리 집 곳간 문을 열어 보니 아무것도 없다. 라면만 빼고.    

 

할 수 없이 주방 불을 끄고 나오지만 결코 빈손은 아니다. 두 손 모두 라면을 쥐고 있다. 이제부터 할 일은 매우 수학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라면의 좌우를 양손으로 각각 들고 절반을 가르듯 두 동강을 낸다. 완벽히 2등분을 했다면 2 등분된 덩어리를 다시 2 등분하고 그 덩어리들을 2 등분하며 2의 n제곱 등분을 이어나가도록 한다. 그렇게 10번 남짓 작업을 하고 나면 봉지를 뜯고 대동소이한 라면 조각을 손으로 집어 먹으면 된다. 조각의 크기가 들쑥날쑥한 게 좋다면 무차별 타격으로 라면을 부숴도 좋다. 개인 취향에 따라 봉지에 라면 수프를 넣어 쉐킷-쉐킷 바텐더 동작으로 마무리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는 라면 봉지를 최대한 해체하여 돗자리처럼 편 뒤 가장자리에 수프를 뿌려 찍어 먹는다. 개인의 취향 껏 해결할 문제다. 어떤 날은 수프를 전혀 곁들이지 않고 주먹 만한 라면 덩어리를 입에 넣고 우걱우걱 부숴 먹고, 또 어떤 날은 엄지손톱만 한 크기로 잘게 부순 뒤 숟가락으로 퍼 먹는다. 이 또한 그날의 기호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아빠는 라면은 끓여야 제맛이라 했지만 이번엔 틀렸다. 부숴 먹는 생라면의 매력도 만만치 않다. 다만 주의할 점이 있다. 소위 '부셔 부셔'-스타일로 먹는다면 나에게 맞는 라면을 잘 골라야 한다. 치아 상태와 저작 능력, 곁들여먹는 분말가루의 풍미, 라면의 굵기와 튀김유의 향까지. '부셔 부셔'를 완성하는 요소는 다양하다. 한 번은 너무 배고픈 나머지 너구리 라면을 생으로 먹어보았다. 결과는 처참했다. 한 입에 바로 악관절이 신호를 보냈다. 굵은 면발에 이유가 있는 법. 오동통통 탱글탱글은 끓였을 때만 해당하는 감각어였다. 너구리 라면으로 시작한 생라면 대탐험은 수십 개의 라면을 거치는 긴 여정이었고 프로토콜의 수정을 거듭하며 나의 임상 테스트는 '스낵면'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의미 있는 결론을 도출했다.


나는 생라면을 특히 늦은 밤이나 호텔방처럼 취사가 허용되지 않는 환경에서 즐겨 먹었다. 와그작와그작 나만 들리는 소리로 씹어 먹으며 밤샘 작업을 하는 재미가 쏠쏠한 데다, 질소만 가득한 배불뚝이 포장이 아니어서 여행에 들고 다니기 또한 간편했기 때문이다. 간혹 해외 출장을 나갈 때 봉지라면을 챙겨 호텔 방에서 나 홀로 스낵파티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만 아는 특별한 맛을 알리 없는 동료들은 봉지라면을 보고 의아해했다. 라면을 끓일 여건이 되지 않아 어쩌냐는 동료들의 시선은 냄비 없이 덩그러니 남겨진 봉지라면은 향해 멈췄고 연민 가득한 그들은 차마 생라면을 떠올리지 못하고 고민에 빠졌다. 대략 이런 해결책들을 건네며.


리셉션에 도움을 받아 끓여 먹기

전자레인지와 용기를 빌려보라는 말에 리셉션이 너무 멀다고 거절했다. 일단 영어로 설명하는 게 번거롭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전자레인지용 용기에 넣고 끓이는 방식은 내가 선호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끓여 먹을 생각으로 챙겨 온 게 아니었다. 막상 부숴 먹을 라면이라고 설명하기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말을 아끼기로 했다. 설명하는 동안 입에 침이 고여 참지 못하고 바로 라면 봉지를 열어 먹어 버리면 그 또한 큰일이기에. (양심 상 라면은 한 봉지만 챙겨갔으니 귀하디 귀한 라면이다.)


뽀글이

겨우 방어를 끝냈나 했더니 다른 동료가 박수를 치며 외쳤다. 뽀글이! 그렇다. 뽀글이는 라면을 부순 뒤 봉지에 그대로 둔 채 뜨거운 물을 넣고 익혀 먹는 간편식이다. 나는 순발력을 발휘하여 봉지에 직접 열을 가하면 환경호르몬이 나와서 좋지 않을 것 같다고 거절했지만 실제로 나에게 적합하지 않은 방식이기도 했다. 라면을 부수는 순간 생라면으로 먹는 게 당연하다는 게 나의 논리였으므로 애초에 내겐 불가능한 조리법이었다. 호르몬보다 무서운 습관의 힘이었다. 부서진 라면 조각은 봉지째로 탈탈 털어먹는 것, 그것은 일종의 조건반사와 같았고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뽀글이는 내 사전엔 없다.  


친절이 몸에 밴 그들에게 더는 숨길 수 없어 결국 나는 이실직고했다. 어떤 도구와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날 것 그대로 과자처럼 먹는 나의 취향을 확인한 그들은 눈빛이 돌변했다. 갑자기 면세점에서 사 온 양주와 미리 준비한 맥주를 방에서 가져오겠다고. 예상치 못한 생라면-맥주의 조합은 다소 갑작스러웠지만 삶이 예상대로 흘러가던 적이 있던가. 나 홀로 부숴 먹을 예정이었지만 라면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먹기 좋은 크기로 변신했다. 라면스프를 가볍게 시즈닝 한 라면 조각들은 자연스럽게 맥주와 어우러졌다. 뜨거운 국물이 없어도 매콤한 가루가 묻은 입술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재미있고 맛있다’라는 표현이 스스로 마음에 든다. 만약 어딘가 재미있고 맛있는 세상이 있다면, 그곳이 내가 가장 살고 싶은 곳일 것만 같다. 나는 아마 거기서도 라면을 먹으며 농담을 하고 있겠지.

윤이나 지음 <라면: 지금 물 올리러 갑니다> 중에서

 

삶이란 어떤 음식일까. 나는 주저 없이 라면이라 말한다. 라면이 내게 맛있고 특별한 음식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지닌 단순하면서도 다양하고, 뜨겁다가도 바삭한 면모가 삶이 가진 보편성을 닮은 이유에서다. 나는 결코 라면을 단순히 면류, 밀가루 음식이라고 분류하지 않는다. 스낵이자 가장 가볍고 편리한 한 끼. 1인 파티든 단출한 술상이든 어디에 두어도 제 몫을 하는 일품요리. 급기야 해장까지 책임지는 라면은 하루의 시작이고 절정이며 끝까지 함께 한다. ‘라면이 당기는 날’은 특별하지 않은 나를 존중하는 날이고 ‘라면이 당기는 영화’는 나만의 특별한 장르였다. 라면은 뜨겁게, 때로는 바삭하게 삶을 관통한다. 끓어오르는 삶이든, 부서져버린 삶이든, 라면은 인생을 꼬불꼬불 뽑아 돌돌 감아 한 봉지에 담고 있다. 불타는 주말이라면, 고달픈 하루의 끝이라면, 라면은 기꺼이 나를 위로해 줄 기호 식품이자 구호 식품이다. 


그래서 삶은, 라면이다.





이미지출처: 오뚜기몰(www.ottogimall.co.krfrontproduct503)




표지 이미지 출처: Pixabay로부터 입수된 Markus Winkler님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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