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큐마 Sep 14. 2021

아니 땐 밤에 이불빨래

회사들에게 치이던 취준생 김새우 일기

11시 반, 이불빨래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급하게 집에 왔다. 집에 가서 꼬질꼬질한 이불을 챙겼다. 후드득. 머리카락들이 바닥에 떨어진다. 집 주변을 둘러봤더니, 세상에 이렇게 더러울 수가 없었다. 갑자기 어떤 힘이 솟아나 침대 시트와 매트리스 커버까지 벗겨냈다. 그리곤 모든 것들을 정리하고 바닥을 밀대로 4번이나 밀었더랬다. 내 두피에 붙어있는 머리카락만큼의 머리카락이 나왔다. 냉장고 사이사이, 신발장까지 닦고, 쓰레기통도 비운 다음, 드디어 이불빨래를 하러 나온 것이었다.

왕십리에서 술 마시는 사람들 사이로 낑낑대고 한 손에는 이불 더미를, 한 손에는 인형을 안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여자. 스스로의 몰골이 웃겨 웃음이 나왔다. 술 먹다 나와 담배 피우던 사람들의 눈길이 따가웠다.

현금도 없어 편의점에서 돈을 뽑았다. 손이 없어서 배로 atm기에 인형을 밀어 고정시키고 겨우 출금 버튼을 눌렀다. 신한은행의 atm기는 이미 11시 반에 닿았기에, 타행 인출 1300원의 수수료까지 내고 2만 원을 얻었다. 그렇게 도착한 크린토피아는 미친 듯이 더웠다. '냉방을 하려면 500원을 넣으세요' 야박한 자본주의의 활자에 헛웃음이 나왔다. 이불빨래 하나 하겠다고 이렇게 공들일 일인가 싶었지만 무거운 이불을 들고 오느라 이미 내 등은 흥건했다. 결국 만 원짜리를 20개 동전으로 바뀐 뒤 하나를 냉방에 헌납하고, 약간 누레진 이불에게 미안해 베이킹소다 옵션을 500원 주고 추가했다.​


나는 가끔 우둔한 사람이 되곤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굳이 이 새벽에 이불빨래를 할 이유는 없다. 내일 아침에 하면 깔끔하다. 그 대신 나는 이불도 모자라, 매트리스 커버까지 벗겨버리고, 온 방을 쓸고 닦고 이불빨래를 하러 가곤 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예상되는 온갖 불운, 수수료 1300원에, 담배 피우는 사람들의 눈길, 야밤에 여자가 홀로 돌아다니는 위험(?)에 예상치 못한 불운(더위)까지 감수해가며 고작 이불을 세탁기에 넣고 뿌듯해하는 사람이다. 왕십리 거리를 낑낑대고 돌아다니는 나는 굉장히 비장했다. 이미 내 머릿속은 이미 아주 깨끗한 시트를 깔고, 아주 깨끗한 방에서 잘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종종 내 안의 무모함을 요즘 느낀다. 최근 별로 가고 싶지 않았던 회사의 서류전형에서 떨어졌다. 사실 쓰자마자 내가 떨어질 것을 알았다. 내 마음에도 들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막상 성의 없는 탈락 문자를 보고 나니 기분이 별로였다. 이걸 하면 붙었을까, 저걸 하면 붙었을까, 별 소득 없는 생각만 들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 앞에서 조용히 무너지고 조용히 다시 일어선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 새벽에 무모하게 이불을 빠는 행위와 같은 것들-을 즐긴다. 이런 무모함이 내 현재와 닮았다.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쓰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넘어질 것을 알면서도 부지런히 뛰어가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이불을 빠는 심정으로, 오늘 밤이 지나고 나면 조금 더 뽀송한 이불을 덮는 잔잔히 신나는 마음으로, 다짐했다. 붙고 떨어지고를 생각하지 말고, 공채가 뜨면 일단 써보기나 하자고. 좋든 싫든 서류만 다 써보자고. 그게 내 목표다. 서류만 다 써보는 것. 그것이 내게 어떤 형태로든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나의 그런 행위는 온갖 손해를 감수하고도 새벽에 이불빨래를 하러 나가는 나와 맞닿아있다. 가끔은 무모하게 나아가야 할 때가 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