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이었던 여우는 잘 살까?

밤마다 나를 놀라게 하던 여우, <놀부심보>가 그립다.

by 코코넛


폭염 경보가 내려진 날인데도 국립 현대 미술관 <서울관>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를 걷다가 몇 번이나 다른 사람과 부딪칠 뻔했다.

긴장했다. 무더위는 사람을 예민하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으로 인한 긴장이었다.

<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 흥미를 끄는 제목이라 참여 작가의 이름을 확인했다.

참여작가 중 내가 아는 작가가 없었다.

표를 구매하는 줄도 길고, 가야 할 미술관이 정해진터라

국립현대미술관을 나와 삼청동길로 향했다.

지나가는 길에 국제갤러리도 잠시 멈추어 전시정보를 수집하고,

서둘러 한미 사진 미술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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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목적지는 한미 사진 미술관이었다.

예상보다 일찍 미술관 근처에 도착했으므로 마을버스를 타고 가는 대신에

이곳저곳 기웃대면서 전시 종료 전에 관람할 계획이었다.

순간의 선택이 고통을 동반하게 했다.

너무 힘드니까 <머리가 나쁘면 팔다리가 고생이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양산을 펼쳐 그늘을 만들고 걸었으나 생각보다 힘든 걷기였다.

시간을 체크하면서 걷다 멈추고 다시 걷는 와중에

맞은편에서 사람이 걸어오면 옆으로 비캬주어야 하는

반복적인 행동으로 걸음의 속도는 지연되었고,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는 강박으로 불안도 따라왔다.

산책처럼 천천히 걷기 좋은 길이라는 생각과 달리

비 오듯이 주르륵 흐르는 땀에 범벅이 된 나는 점점 지쳐갔다.


한미에서 본 전시는 <밤 끝으로의 여행>이다.

30여 작가의 100개 정도 되는 규모의 소장품 기획전인데,

나는 역시 실험적인 작품을 더 선호하는지,

구본창 작가의 작품과 황규태 작가의 작품이 눈에 확 들어왔다.

구본창 작가의 작품 앞에 가장 긴 시간을 할애했다.

흑백사진이어서 농담이 주는 맛 때문에 그랬는지,

작품에서 아슬아슬한 어떤 것? 넘나드는 그 무엇이 <긴장>에 가까웠다.

설렘에 가까운 긴장이었다.

황규태 작가의 작품은 화려하고 강렬한 색감의 작품이었는데,

마치 분출할 것 같은, 폭발할듯한 <불안>을 그 안에서 느꼈다.

화려한 불안?


전시장에서 봤던 사진 작품에서부터

<긴장>과 <불안>이라는 두 단어는 귀갓길에 내내 껌딱지처럼 붙어서 함께 왔다.

어떤 상황에서 나는 긴장하는지,

또 어떤 상황에서 불안을 느끼는지로 이어진 단어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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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을 보면 단어가 떠오른다. 의자, 옷걸이, 열쇠,

이전에는 그의 생각을 딴 데로 돌릴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너무 조용했다.

한편으로는 주위가 너무 밝아서 대상들을 볼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생각을 딴 데로 돌리기에는 주변이 너무 조용해서

그는 대상들을 마치 광고물 그 자체인양 바라보기도 했다.”


_페테 한트케의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에서 발췌


<긴장>과 <불안>을 떠올리자 다람쥐와 여우가 퍼뜩 떠올랐다.

영국에 거주할 때 우리 집에 매일 방문하는 여우가 았었는데,

나는 여우에게 <놀부심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이유는 여우가 내 신발 한 짝씩을 물고 가서였다.

다른 사람의 신발은 물고 가지 않고 항상 내 신발만, 그것도 한 짝만 가져갔다.

주로 밤에만 나타나

창 밖에서 나를 응시해서 놀라게 하던 여우가 어느 날 이른 저녁에 왔다.

초여름이라 해가 길어져서 밝았던 것이지

시간은 매일 오던 시간과 비슷했을 수 있다.

그때 나무 울타리 위로 다람쥐가 행진하고 있었고,

여우는 내가 아닌 다람쥐를 뚫어져라 봤다.


그 장면을 본 이후였다.

몇 날 며칠을 <쿵>하는 소리가 들려 정원을 내다보면

여우가 우리 집 나무 울타리 위에서 정원에 떨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울타리로 기어오르는 모습을 봤다.

날을 세지 않았으므로 정확한 기간은 알 수 없지만,

꽤 오랜 기간 <쿵> 떨어지는 소리가 지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여우가 나무 울타리 걷기에 성공한 것을 보았다.

<놀부심보>는 내가 자기를 바라보는 것을 확인했고

의기양양한 태도로 울타리 위에서 걸었다.

여우와 다람쥐는 서로 등치가 달라서

다람쥐가 나무 울타리 위로 달리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지만,

여우는 걷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기에

<놀부심보>가 기특해서 그날 저녁 여우가 좋아하는 소시지를 정원에 갔다 놓았다.

일종의 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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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부심보>는 아직 살아있으려나?

친해지기 전까지는 어둠 속에서 눈동자만 빛내면서 나를 바라보아서

작업하다 말고 깜짝 놀라는 <긴장>을 선물했고,

이름 붙여주고 친밀해진 이후엔

다람쥐처럼 나무 울타리 위에서 걷기에 도전장을 내민

무모해 보였던 행동으로 <불안>을 선물했던 <놀부심보>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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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의식이나 사고를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공격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방어력 없이 저항하지 않고 누워있었다.

욕지기가 나면서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낯선 것은 아니었지만, 좀 혐오스러웠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그 충격으로 그는 이상해져 버렸고 일상에서 빗나가게 되었다.

그는 실제로 그렇게 아무런 가능성도 없이 그곳에 누워있었다.

비교할 것도 없었다.

자기 자신에 관한 의식만은 너무 강렬해서 불안스러웠다.

그는 땀이 났다.

동전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침대 밑으로 굴러갔다.

귀를 기울였다. 기울였다. 비유인가?”

-페테 한트케의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에서 발췌


<긴장>이나 <불안>은 신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그 영향은 또 정신에 얼마나 큰 부위를 차지하는 것일까?

두 단어가 파생한 호기심과 닮은 그리움?

<놀부심보>의 안부가 걱정으로 와서 불안으로 머문 날이다.

2018년 방학 때 영국에 1개월 이상 머물렀지만,

<놀부심보>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놀부심보>가 많이 말랐었으므로

행여나 굶어 죽지 않았을까? 하는 불안?

지혜롭고, 열정적이고, 붙임성 있던

<놀부심보>가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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