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천천히, 시간이 흐를 뿐이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_#2016년 3월

by 토토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츠네오(츠바부키 사토시 粉)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한 겨울의 여행이었다. 엄청나게 추웠던 기억이 있다. 너무 추워서 먹었던 라면. 이건 뭐지? 바나나 초콜릿?...수족관. 휴관이었다. 바다. 부서진 조개껍질. 부서진 전구. 그때가 그립다...이게 몇 년 전 이더라"


몇 년 전이었을까. 지금으로부터 십이년 전인 2004년 10월.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그 해 국내에 개봉해 수년 간 숱하게 회자돼 왔다. 그리고 2016년 3월, 다시 스크린에 올랐다. 어느 해, 깊고 긴 강을 건너온 연인(戀人)을 만난 것처럼. 반갑고 또 먹먹하다.

#만남


다리가 불편한 조제는 계단식의 의자에 기어올라 곤로 앞에서 음식을 한다. 곤약을 졸이고, 고등어를 굽고, 계란말이를 만든다. 요리가 끝나면 바닥으로 몸을 날려 떨어진다. 작은 체구지만, 제법 쿵 소리가 난다. 조제의 방식은 그렇다. 두 다리를 끌고 식탁으로, 책을 읽는 옷장으로 이리저리 몸을 옮긴다.


츠네오는 낯선 조제에게 먼저 말을 건다. 김이 스멀스멀 오르는 계란말이가 맛이 있었나 보다. 츠네오와 조제가 조금씩 경계를 풀고 한 두 마디를 나누는 모습은 오로지 그들의 것인 것만 같다. 추억이라는 한 단어에 담을 수 없는 셀 수 없는 구어(口語)들이 이때부터 차곡차곡 쌓인다.

#조제와 '조제'


조제는 2004년 작고한 프랑스의 소설가 프랑수와즈 사강(Francoise Sagan)의 '한 달 후, 일 년 후(1957년作)'를 좋아한다. 조제는 이 책의 한 인물인 '조제'가 마음에 들었는지 자신에게 이름을 묻는 츠네오에게 자신을 조제(본명은 쿠미코다)라고 소개한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세상과 동떨어져 할머니가 주워 온 책만 읽던 조제에게 이 책은 그렇게 특별했나 보다. 조제는 츠네오가 이 책을 집어 들고 사강을 아는 체 하자 득달같이 달려든다. "이 책의 속편이 있다는데, 혹시 제목을 알아?"


그 책은 사강이 1961년에 내놓은 '멋있는 구름'이다. '한 달 후, 일 년 후'의 속편 격인 이 책에도 조제가 등장한다. 츠네오는 이 책을 구해 조제에게 건넨다.

"언젠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 거야". 베르나르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지. 우린 또다시 고독해지고. 모든 게 다 그래. 그냥 흘러간 1년의 세월이 있을 뿐이지."

"네 알아요." 조제가 말했다.

조제는 '멋있는 구름'의 베르나르와 조제의 대화처럼 '언젠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과, 언젠가는 그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을 알게 됐는지도 모른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물고기들을 어느 외곽의 모텔에서 마주한 조제는 츠네오에게 말을 건다. 조제는 츠네오에게 눈을 감으라 말하고, 츠네오는 그냥 깜깜하기만 하다고 답한다.


"거기가 옛날에 내가 살던 곳이야. 깊고 깊은 바다 속 난 거기서 헤엄쳐 나왔어. 너랑 세상에서 가장 야한 섹스를 하려고. 그곳은 빛도 소리도 없고 바람도 안 불고 비도 안와. 정적만이 있을 뿐이지. 별로 외롭지 않아.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냥 천천히 천천히 시간이 흐를 뿐이지. 난 두 번 다시 거기로 돌아가진 못할 거야.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아"

#이별


"담백한 이별이었다. 이유는 여러가지 있겠지만. 아니, 사실 단 한 가지였다. 내가 도망쳤다."


조제는 걸을 수 없다는 명백한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조제와 츠네오의 사랑에서 그 장애는 점점 희미해진다. 이별 사유는 '도망'이라고 적혔지만, 조제의 장애 사실에서 도망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들은 왜 헤어진 것일까.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을 우리는 츠네오의 마지막 대사를 통해 들을 수 있다. 어떤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그들의 사랑과 이별에 대해, 자신이 사랑한 조제에 대해.


"헤어지고 친구로 남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조제는 아니다. 조제를 만날 일은 다신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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