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표현을 어려워하지 않길 바라며
가끔 연가를 써서 한 주의 근무시간을 줄인다. 사람들은 가끔 연가를 쓰면 무엇을 하는지 묻는다. 거창한 계획은 당연히 없다. 즉흥적으로 낸 휴가니까. 내가 힘드니까 오늘은 좀 먼저 셔터 내리겠습니다, 하고 퇴근을 한다. 당연히 내 할 몫은 미리 끝내놓는다. 나의 휴식으로 인해서 누군가가 덜 쉬는 일은 없어야 하므로. 퇴근하자마자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캔들을 켠다. 흐르는 시간과 함께 하루를 흘려보낸다. 아쉬운 순간은 없다. 내가 쉬고 싶었으니까. 먹고 싶은 걸 사 먹고 가고 싶은 곳을 가고, 휴가를 내 마음대로 쓴다. 배달은 시켜 먹지 않는다. 그렇게라도 해야 공기를 좀 마시며 밖을 나가니까.
사람들은 휴가를 되게 아까워한다. 본인 휴가도 아니면서 늘 아깝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 아까운 휴가에 누워만 있었어? 휴가는 모름지기 거창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거창하게 계획을 세워 놀러 가고 싶은 때도 있지만, 가끔 휴가를 내서 아무것도 안 하고 나를 돌보는 시간이 가끔 필요하다. 매일 사람들과 만나면서 마음적으로 조금씩 닿아있게 될 때, 불편할 때가 있다. 이런 연결고리들이 있어야 우리는 사회성을 키우고 사회에서 정상적인 사람으로 자라난다고 하지만, 어떤 사람들과는 닿는 순간부터 함께 힘들어지기도 하니까.
어제는 이른 퇴근을 하고 호흡이 짧지만 좀 긴 글을 썼다. 2시간 30분 동안 내내 한 자리에 앉아서 벽에 살짝 기대어 적었다. A4용지 8장을 거의 채운 분량이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좋았다. 우울감이 느껴져. 일부러 그렇게 적은 거지? 혹시 우울한 상태야? 라든지. 내가 적는 글들은 늘 주인공이 죽거나 불행하다. 내 친구가 그랬다. 그래도 행복한 글을 적고 싶지 않아? 잔잔하게 부유하는 우울감들이 글감과 닿으면 더 깊어진다. 행복한 순간들을 써놓은 글들은 이미 많기 때문에 사회에서 가장 불행하고 가장 고립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적고 싶다고 말했다. 저마다의 불행을 불행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행복만 전시해 놓는 사회에서 불행한 사람들의 죽음이 끊임없이 느는 통계가 시사하는 바는 늘 깊게 와닿는다. 며칠 전 썼던 소설 '친절한 사회'는 쓰다가 힘들어서 쓰지 못했다. 완벽하게 고립되어 가는 어른들의 이야기였는데, 그런 고립적인 감정을 느껴보고 싶어서 가끔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든다. 일부러라도.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유의지에 의하여 쉼을 택한 사람들과 타의와 자의에 의해서 쉬어지는 사람들이 느끼는 고독에 대한 의미는 반드시 다를 것이라고. 진정으로 불행한 감정들은 전시되지 않는다. 그런 불행함은 죽거나 발견되거나 영원히 발견되지 않는다. 불행함을 전시하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물을 수 있다. 목적이 있는 전시들은 그 사람 자체가 불행하다기보다 요행을 바라는 경우가 많다. 어떤 공감을 바라거나 내가 이만큼 불행했는데 나랑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보고 싶거나. 사람들은 가끔 나에게 힘든 일을 적는 것에 대해 물을 때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네가 힘들다 우울하다고 적는 글을 보고 기뻐할 수도 있어. 나는 그 사람들이 기쁘길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적지 않기 때문에 그런 조언들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누군가가 전시한 불행과 우울을 보며 내 인생은 저 정도는 아니니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을 내뱉거나 갖는 사람들은 그 정도의 사람들이다. 그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애초부터 나와 함께 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힘들고 어렵다는 말을 잘할 수 있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예전 함께 근무했던 병사애가 그런 말을 했다. 생글생글 잘 웃어주지 마세요.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실 줄도 아셔야지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결재판으로 머리를 맞은 날이었다. 나는 그렇게 머리를 맞았으면서도 그냥 어색하게 웃었다. 표현하는 법을 몰랐다. 불편합니다, 라든지 이런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와 같은 것들을. 걔가 퇴근길에 나에게 해준 말이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생각이 난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세요. 요즘 사람들은 신기할 정도로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이게 어렵다고 말하면 정말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잘 모르겠다는 말 조차 하지 않는다. 이 업무가 처음이라 제가 많이 어설프지만 알려주시면 바로 해볼게요, 라든지 어려우니 다시 한번 알려주시겠어요?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전부 프로페셔널한 사람들만 모인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다들 아는 체를 해야 하는 사회라고 믿는다. 그래야 무시를 당하지 않는다고. 직장생활 10년 차에 아는 체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는 체를 한다는 것이 보인다. 그럼 나는 다시 묻는다. 아는 거 맞지? 맞단다. 아니잖아. 사실은 아니란다. 어려우니 알려달라는 말을 하기가 어려운 요즘이다. 나도 여전히 모르는 게 많아 늘 이 업무는 처음 해보는 것이라 알아보고 연락드려도 될까요, 를 요즘에도 달고 사는데.
내 주변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라는 것이 아니다. 모르면 모른다, 알면 안다. 내가 당신을 돕겠다. 당신은 나를 도와라, 이 말이 왜 그렇게 어려운 건지. 나는 4년 전 본 업무를 못 배웠다는 것이 나에게 큰 약점이었다. 그래서 모르면 모른다고 말할 수 있었다. 모르지만 배우겠다, 이게 왜 부끄러운 말인지 여전히 모르겠다. 두 번 알려줬는데 모르면 그건 어쩔 수 없지만 배우겠다는 의지가 있으면 조금 더 친절해질 수는 없는 걸까. 어떤 사람은 와서 손가락질을 하고 일도 모르는 게 뭔 일을 하냐며 소리를 지르는 경우도 있었고 네가 하는 일이 진짜 제대로 된 업무도 아니라면서 본인은 이미 여러 일을 거치며 네가 하는 업무를 다 꿰뚫고 있다며, 네가 하는 걸 보면 아주 우습다고 했던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사람이라기보다는 정말 다방면으로 못 배운 사람들이라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걸 (지금은) 알지만 그때는 그게 되게 충격이었다. 내가 모르면 알려주면 되는 거고, 본인들은 알지만 너를 알려주긴 싫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대놓고 하는 게 되게 신기했다. 일반적인 사람의 사고방식이 아닌 사람들. 그렇지만 또 네가 알아서 배워야 한다며 그게 맞다고 박박 우기는 사람들. 그렇게 업무를 잘하고 못 하고를 따지는 사람들은 엄마 뱃속을 가르고 나오는 그 순간부터 일을 잘하는 사람들인 줄 알았다. 어디서는 너무너무 잘해서 모르는 일이 없을 것 같은 그런 사람들은 실패를 겪어본 적이 없어 나중에 크게 무너진다. 나는 그 사람들이 언젠가 크게 무너질 것을 안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우기고 자존심을 부리며 일하는 사람들을 보며 어떤 전시는 필요하기도, 또 어떤 전시는 필요 없다는 것을 절감한다.
가르침이라는 게 떠먹여 주라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굳이 친절하시라,라는 말을 가끔 한다. 내가 친절할 때 나를 막 대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친절을 베풀 필요가 없고, 친절하게 대했을 때 돌아오는 친절이 비슷하다면 마음을 다해 또 굳이 굳이 친절하게 대하면 된다.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한두 번쯤은 아주 친절하게. 나도 모를 때 어떤 친절을 통해 배움을 얻었듯이 누군가도 나의 친절을 간절히 바랄 수도 있으니까. 어제 그 글의 주인공은 내가 꿈꿔온 굳이 친절한 사회에서 살며, 다른 차원의 행복을 맛보고 있을는지 궁금하다. 나는 내 소설 속 주인공이었던 머리숱 없는 아저씨와 그 남자의 아내, 낮이나 밤이나 눈이 오나 밤이 오나 매일매일 바닥을 청소하는 허리 굽은 미화원 아저씨. 그리고 어제 만들어진 어떤 마법을 동경하던 작가들이 내가 적지 않은 행복한 소설 속에서 분에 넘치는 행복을 누리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