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욕탕 뽀이 이야기 - 07
7. 우린 그런 나이였어.
그녀와 걷던 중랑천 뚝방길에서 군자교 남쪽으로 거슬러 내려가다 보면 좁은 골목길 몇 가닥을 만나. 그 골목 중 다람쥐꼬리처럼 유난히 굽은 길을 따라가면 크고 작게 늘어선 상가 중 유난히 큰 창문이 괴수의 아가리 같은 목욕탕 건물이 나와. 주변의 다른 건물에 비하면 그저 그런 규모인데도 안에 도사리고 있는 때밀이 형 때문에 항상 두려움을 느꼈어. 열일곱 살의 그때 그 건물이 아직 있을까 싶어 혹시나 하고 인터넷 지도를 찾아봤어. 마우스를 움직여 로드뷰의 파란 실선을 따라가는데, 헐. 아직도 그 건물이 있더라. 삼십오 년이 지나는 동안 전철역이 생긴 그 동네. 목욕탕은 식당으로 바뀌었고 길 건너 중국집은 핸드폰 가게가 되었더라마는, 그녀가 일하던 다방 지하 계단 입구도, 내가 매일 담배꽁초를 쓸던 마당도 그대로였어.
근데 이상해. 모니터로 그 건물을 보는 순간, 갑자기 어떤 낯익은 냄새가 훅 끼쳐오는 거야. 탈의실 거울 앞에 아무렇게나 흩뿌려져 있던 싸구려 스킨 냄새. 목욕탕에서 손님들이 손바닥에 가득 부어 얼굴을 찰싹거리며 바르는 그 스킨 말이야. 그거 사실 어떤 화장품 가게에서 큰 병에 넣어 오는 거야. 때밀이 형은 어디서 고급 남성 화장품 병을 구해다 주고는 매일 아침마다 따라놓게 했어. 스킨 냄새 말고 또 있어. 크레졸 냄새. 난 특히 그 냄새가 괴롭더라. 일주일에 한 번씩 대청소를 할 때마다 크레졸로 목욕탕 바닥과 배수로를 닦았거든. 비누와 때가 범벅이 되어 퀴퀴하다 못해 역한 냄새를 없애려면 독한 세제가 필요했겠지? 크레졸을 긴 솔에 묻혀 바닥을 문지르다 보면 발바닥이 화끈거리다가 살갗이 벗겨지곤 했어. 슬리퍼라도 신고 닦으면 좋으련만 때밀이 형이 눈을 부라리고 지켜보니 신을 수가 있나. 그때 난 또 서러워 눈물을 찔끔거렸을 거야.
그녀를 만나기 전날도 대청소를 했으니 함께 중랑천 뚝방길을 걷던 내게도 그 냄새가 났겠지. 그녀가 맡은 냄새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세균을 무찌른 희망의 냄새였을까, 고단한 노동의 냄새였을까. 시간이 지나 풍경이 바뀌었어도 목욕탕 시절의 기억이 순식간에 소환되고 마는 건 아직 내게 남아 있는 상처와 환희들 때문이야. 상처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다양한 이유로 받았어. 나를 막 대하는 때밀이 형, 조개탄을 가득 실은 트럭이 올 때마다 나를 불러내려 등짐으로 탄을 나르게 하던 보일러 실장, 여탕에서 나온 수건까지 세탁해서 말려달라고, 때밀이 형 모르게 시키던 여탕 누나, 나와 동갑인 자기 아들과 비교하면서 너도 학교 다녀야 할 텐데, 위로인지 놀림인지 애매한 말을 하시는 카운터 이모까지 . 하지만 환희는 오로지 그녀로부터만 왔어. 목욕탕으로 상징되는 긴장과 불우의 시간 속에서도 유일하게 나를 콩닥거리게 하던 존재. 터널의 끝에 그녀만 서 있다면 그깟 어둠 쯤이야 너끈히 건너 뛸 것 같은 존재.
이미 진 개나리와 벚나무가 양쪽에 풍성하게 늘어져있던 뚝방길을 걸었어. 우린 누가 봐도 연인이었어. 미처 깎지 못해 덥수룩한 머리의 나와 달리 플레어스커트를 단정히 입은 그녀는 얼마나 예쁘던지. 평일의 한산한 뚝방길. 일에서 벗어난 해방감도 한몫했겠지만 그녀가 없다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행복감이었어. 그녀와 얼마나 걸었을까, 뚝방길 벤치에 앉았어. 나는 근처 가게에 달려가서 하드를 사 왔지. 비비빅. 50원이면 살 수 있었던, 통팥이 들어 있는 갈색의 하드. 내가 지금도 그걸 기억하는 건 그녀의 치마에 비비빅이 녹아 한 방울이 떨어졌던 기억 때문이야.
"시발. 좃됐네."
잽싸게 치마를 닦으며 무심코 그녀가 내뱉었어. 그런 표현을 쓰다니. 아마 나도 모르게 순간 표정이 굳어졌겠지. 그녀 또한 내 눈치를 봤어. 그녀가 민망할까 봐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려 딴 데를 봤어. 그녀는 이왕 벌어진 일, 뭐 어쩌겠냐는 투로 침을 찍 뱉었어. 난 그녀가 아무리 험한 욕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을 자신이 있었어. 그녀는 말없이 치맛자락을 비벼 얼룩을 문지르더라. 근데 잘 안 지는 거야. 난 그녀의 민망함을 달래주고 싶어서 그녀의 말투를 따라 하며 편을 들었어.
"좃된 거 맞네요."
그녀도 피식 웃더라. 그러더니 이내 깔깔 웃었어. 시원한 웃음을. 나는 내친김에 담배를 건넸어. 그녀가 가끔 밖에 나와 담배 피우는 걸 봤거든. 그녀에게 불을 붙여 주고 나도 하나 무는데 그녀가 낚아챘어.
"어허, 넌 애가 뭔 담배냐? 이마에 피도 안 마른 게. 피지 마."
지금 내 걱정을 해 주는 건가? 기분이 좋아졌어. 왜 그런 거 있잖아. 상대는 별 뜻 없이 한 말인데 나 혼자 온갖 의미를 부여해서 혼자 뭉클해하는 거. 짝사랑의 전형적인 모습이랄지. 그 날 이후로 그녀 앞에서 담배를 안 폈어.
그녀가 주로 말을 하고 난 들었어. 아니, 내 이야기를 그녀가 듣게 하고 싶지 않았어. 배수로에 크레졸을 붓고 이미 너무 닳아빠진 솔을 박박 문지르는 이야기를. 형에게 이유도 모르고 먹은 욕이나 발바닥을 논바닥처럼 허옇게 갈라지게 하는 그런 이야기는 안 하는게 좋을 것 같았어. 대신 그녀 입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으니까.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 역시 들어주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녀를 식모처럼 부려먹는 마담과 자기를 다방 레지 취급하면서 한번 어떻게 해보려고 수작을 거는 남자 손님들 이야기들. 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 그녀도 못지않아 보였어. 내가 구사할 수 있는 가장 억센 표현으로 그녀를 괴롭히는 자들을 저주해주었어.
"마담 그 개년이네."
그러자 그녀도 내 편을 들어주었지.
"때밀이 새끼 대가리를 도끼로 쪼아버려야돼."
정작 그들 앞에서 한 번도 당당하지 못했던 우리였지만, 그 날만은 때밀이 형이나 다방 마담도 우리에게 난도질을 당했어. 귀가 간지러웠을 거야. 빈 말일 수밖에 없는 신세타령이 뭐 우습다고 우린 빈 웃음을 깔깔 웃었어. 그런 나이였어. 아무렇지도 않은 일에 먼저 까르르 웃음이 나오는 나이. 목욕탕에서, 다방에서 일할 땐 웃음이란 걸 잊었는지 몰라. 시키면 시키는 대로 언제나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일만 했지. 그렇게 별 것도 아닌 걸로 까륵까륵 웃다 보니 기분도 나른하고 좋았어. 어떤 아주머니가 길을 물어보시기 전까지만 해도.
"학생, 중고차 시장이 어느 쪽이야?"
학생? 나한테 묻는 건가? 주변을 봤지만 아무도 없었어. 난 학생이 아닌데. 학생이라는 말을 오랜만에 들으니 낯선 기분이 들었어. 집 나와 있는 내게 느닷없이 들려오는 엄마 목소리처럼. 더구나 지금은 수요일 오전. 학생이 학교 안 가고 여기 이러고 있을 리 없잖아. 학생이었다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일이 갑자기 나를 당혹스럽게 했어. 그냥 손가락으로 중고차 시장 방향만 가리켜 드리면 될 일인데 내 머리 속이 뭐가 어떻게 꼬였는지 혼란스럽기만 했어. 아주머니는 내 덥수룩한 머리를 못 보셨나? 척 봐도 학생이 아니잖아. 그녀도 마찬가지였어. 어깨까지 머리를 기르고 입술에 루즈를 바르는 학생이 어딨어. 우린 학생이라고 하기엔 외모부터가 너무 달랐어. 학교 규정과 너무 다른 머리스타일에 뭔가 어른의 챙김이 미치지 않은 듯 싸구려 옷차림. 학생이라면 지니고 있었어야 할 단정함이나 격조가 느껴지지 않는 상스런 말투. 그리고 싹수없이 꼬나 문 담배까지. 그분은 단지 길을 물어보려고 우리를 학생이라고 불렀을지도 몰라. 하지만 우린 갑자기 장면이 멈춘 영화를 대하듯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어. 그냥 모른다고 해도 될 텐데. 또 그 말도 안 나왔어. 아무튼 아무 말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그녀가 먼저 말했어. 퉁명스러운 말투로.
"아줌마, 우리 학생 아니에요."
아주머니는 우리가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어깃장을 놓는다고 생각했을까. 언짢은 표정이었어.
“아니, 그러니까 중고차 시장이 어느 쪽이냐고. 응? 그것만 말해주면 되잖아.”
“아, 몰라요! 그리고 우리 학생 아니라구요. 짜증 나게, 시발...”
그녀가 벤치에서 일어나면서 바닥에 침을 찍 뱉고 신발바닥으로 거칠게 문지르더니 담배를 물었어. 도발적인 그 태도에 아주머니는 확 달아오르는 표정으로 욕이라도 할 듯 입을 떼려다 우리 발밑에 수북하던 꽁초를 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가버렸어. 욱한 반응을 보인 그녀도, 그걸 본 나도 서로 어색해져서 방금 전까지 명랑하게 주고받던 이야기들은 더 이상 하지 못했어. 그리고 한동안 그곳에 가만있었어.
학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불쑥 나를 휘감던 당혹스러운 낭패감은 어디에서 온 걸까. 고등학생이 되지 못했던 열패감이 내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다가 불쑥 튀어나왔던 건 아닐까. 그래서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놀란 건 아닐까. 그 일 이후로 우리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지금도 확실하게 기억나는 게 있어. 하품이 걷잡을 수 없이 잦아진 일이야.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아 있기가 민망할 만큼 하품을 해댔어. 하품이라는 게 감추려고 하면 더 나게 마련이잖아. 나나 그녀가 잠이 모자라도록 일을 하니 어쩔 수 없었을 거야. 그나마 데이트에 대한 기대 때문에 참아졌던 하품이 아주머니 이후로 김 빠진 분위기를 밀고 나온 거야. 까닭 모를 낭패감과 하품. 갑작스러운 이 기분이 뭔지 생각해보기도 전에 속이 상했어. 하품을 상대로 한 건 아니야. 뭔가 바꿀 수 없는 내 삶의 어떤, 끝내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목욕탕 냄새 같은 현실에 대한 짜증이 올라오는 느낌.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무슨 잘못이 있어서 내 삶이 이리도 비루할까.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앞으로 내 삶에서 더 이상 하품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그녀와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멀지 않은 어린이 대공원에라도 가려고 했던 계획은 차라리 목욕탕에 돌아가서 한 잠 자는 걸로 급히 수정됐어. 한 달에 하루 쉬는 날을 제외하면 늘 잠이 모자란 우리에게 쉬는 날이란 부족한 잠을 메우기도 바쁜 날이었으니. 학생이 되었어야 할 나이에 학생이 되지 못한 처지를 아주머니가 일깨워주지만 않았더라도 쏟아지는 하품을 어떻게든 참고 그녀와 시간을 보냈을지도 몰라. 목욕탕으로 돌아가던 길에 우리는 나란히도 아니고 그렇다고 앞 뒤도 아닌 어정쩡한 거리를 유지하며 걸었어.
헤어지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오늘 즐거웠다고, 어서 들어가서 푹 쉬라는 말을 했던가. 우리가 비록 학생은 아니지만 기죽지 말자고, 우리 삶의 희망을 기다려 보자는 위로를 했던가. 절망스러운 삶에 서로의 뮤즈가 되어 주자는 약속을 했던가. 차라리 집에나 갈 걸. 동생들에게 돼지고기나 볶아 줄 걸, 하고 늦은 후회를 했던가.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녀는 지하 다방의 구석방으로, 나는 텅 빈 탈의실로 돌아가 고꾸라져 밀린 잠을 잔 일 말고는.
8.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십쇼!
열등감을 들켜 하품만 하고 끝나버린 데이트의 여운은 제법 길었어. 고등학교에 못 간 경험이 없다면 내가 별나 보일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그땐 또래들이 당연히 누리는 걸 나만 빼앗긴 것 같아 주눅 들어 있었어.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차례대로 빵을 하나씩 나눠주다가 나를 건너뛰고 다음 아이로 넘어갈 때 느끼는 박탈감 같은 거. 그 열패감은 분노로 곧잘 이어졌어. 난 꽤 뾰족하고 모 난 아이였나 봐. 목욕탕이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 멀지 않아서 가끔은 중학교 동창이 손님으로 왔어. 그 중엔 꽤 친했던 친구도. 그것도 아버지와 함께. 친구도 놀라고 나는 더 놀랐지. 친구 아버지는 때를 밀었어. 때를 밀면 드라이가 공짜야. 보통 손님들은 100원짜리 동전을 넣고 2분 작동하는 드라이어를 쓸 때였거든. 그런데 형이 나더러 드라이를 해 드리래. 형이 특별히 관리하는 단골손님에게는 드라이 서비스를 했거든. 친구가 지켜보는데 드라이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형이 시키니 별 수 있나? 내가 드라이를 해드리는 동안 목욕이 끝난 친구는 옷을 입고 탁자에 앉아서 지켜보았어. 기분이 이상하더라. 내가 종이 되는 느낌이랄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같은 교실에서 기타 치고 놀던 친구였는데. 공교롭게도 그 날은 내 드라이 실력이 마음에 안 드셨는지 친구 아버지의 잔소리가 많으셨어. 앞 머리를 더 세워라. 드라이가 뜨겁다, 머릿기름도 발라라... 급기야는 짜증을 내면서 드라이를 빼앗아 자기 손으로 하셨어. 그 장면을 본 형은 나를 노려보면서 눈 야단을 쳤지. 난 어쩔 줄 몰라하며 굽신거렸어. 그 장면을 친구가 다 보는 거야. 아무 데로나 사라져 버리고 싶었어. 차라리 친구가 딴 곳에 가 있거나 안 봤으면 좋겠는데. 그 친구도 그런 눈치가 없었을 거야. 사실 그런 눈치는 특별한 경험을 해야 얻어지는 거잖아. 아직 우린 어렸으니.
어쩌면 친구가 더 당황했을지도 몰라. 외면 하자니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함께 괴로워하면서 있었을 수도 있어. 걔는 학교 다닐 때도 착한 아이였거든. 걔나 나나 사실 아무 잘못은 없어. 내가 고등학교 못 가고 목욕탕에 와 있는 게 문제지. 근데 난 그 상황이 영 괴롭더라고. 괴롭다 못해 짜증이 나는 거야.
"씨팔."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어. 대상도 없이. 그냥 나왔어. 작은 우물거림도 없이. 처음이었어. 혼잣말 욕이 나온 게. 바로 후회했어. 혹시 친구가 들었을까 봐. 난 그런 애가 아니었는데. 이렇게 달라진 걸 알면 친구 마음은 어떨까. 고등학교 못 가면 저렇게 되나 보다, 생각할까? 그런 생각을 하니 우울했어. 눈물이 막 나오려고 했어. 그때 형이 말했어.
“야, 손님 베지밀 하나 따 드려라.”
형이 보지 않게 눈을 꼭 감아 눈물을 막으면서 냉장고 앞으로 갔어. 미닫이문을 열고 베지밀을 하나 꺼낸 다음 냉장고 모서리 고무줄에 길게 매달린 병따개로 뚜껑을 땄지. 평소 하던 대로였어. 그러니 마음이 좀 진정되는 기분이었어. 빨대를 재빨리 꽂아 친구 아버지를 향해 허리를 굽히면서 두 손을 쭉 내밀며 외쳤어.
“베지밀 하나, 여깄습니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십쇼!”
손님이 주문을 하면 항상 이렇게 말하라고 형이 시켰거든. 일부러 요란스럽다 싶게 인사를 하는 건 주변 손님들 들으라고 하는 거야. 그러면 그들도 사 먹곤 하거든. 그런데 그날은 이런 게 영 괴로웠어. 내 친구가 다 보고 있잖아. 내가 돈 버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뭐 어쩔 수 없다고 생각이 드는데 지금 내가 하는 모습은 좀 굴욕적인 느낌이 들잖아. 작년의 난 이런 모습이 아니었거든. 나름 멋진 아이였단 말야. 그런데 지금의 이 모습은... 버러지나 다름없지 뭐야. 그런데 이번엔 그걸로 끝나지 않았어. 친구 아버지가 아들에게도 베지밀을 하나 주라며 돈을 내셨어. 형이 시킨 대로라면 이번에도 역시 두 손을 쭉 내밀어 받으면서 네, 베지밀 하나! 즉시 드리겠습니다! 외치고 신속하게 내 드려야 해. 그런데 도저히 못하겠는 거야. 적당히 얼버무리다 말을 못 하고 냉장고 문을 열고 베지밀을 꺼내 병을 따고 빨대를 꽂았어. 형의 표정이 또 일그러졌어. 그런데 친구에게 두 손으로 바치면서 외치는 건 죽어도 못 하겠는 거야. 친구와 아버지가 목욕탕을 나갈 때에도 원래대로라면 안녕히 가십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인사를 해야 하는 데 그것도 못했어. 형이 시키는 대로 안 했으니 혼날 생각에 겁도 나면서 형의 단골손님 기분을 나쁘게 했을까 봐 미안한 마음이 든 채 그들이 놓고 간 베지밀 병을 치우는데 내 등짝에 철썩, 형이 던진 때밀이 타올이 날아왔어.
“어쭈, 이 쉬애끼가. 뒤지려고! 야, 이 씹... 내 말을 안 들어?”
잽싸게 때밀이 타올을 집어 들면서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라고 말하려고 돌아서는데 또 철썩. 형의 투박한 손이 내 뺨에 말렸다 풀렸어. 얼결에 손에 들고 있던 베지밀 병과 타올이 바닥에 떨어져 뒹굴며 베지밀이 흘렀어. 한쪽 눈 근처 살이 따갑게 당겨지는 느낌이 들면서 시야가 흐렸지만 벌떡 일어나서 때밀이 타월을 얌전히 테이블에 올려놓고 후다닥 뛰어 마른 수건을 하나 가져와 베지밀을 닦고 병을 정리한 뒤 형 앞에 종종걸음으로 가서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짧게 외쳤어. 그게 형의 화를 가장 빨리 달래는 방법이거든. 형은 나를 찌를 듯이 날카로운 눈매로 노려보더니 다음 손님 때를 밀러 탕 안으로 들어갔어. 그제야 나도 뒤로 돌아 창가로 갔어. 주르륵 코피가 흘렀어. 뭐가 서러운지 눈물이 막 났어. 이러면 큰일인데. 형이 이걸 보면 더 맞을지도 모르는데. 나도 모르게 탕 쪽 문을 흘깃거리며 잽싸게 눈물을 닦았어. 팔뚝에 투명한 눈물이 묻어났어. 탕 안에 들어가 바가지를 정리하는 척하며 물 한 바가지를 떠 눈을 씻고 나왔어.
나의 내면에 저항과 분노의 씨앗이 지금도 남아 있다면 아마 그때부터 자라기 시작했을 거야. 그 친구처럼 나도 학생이었다면, 그래서 일하다 맞은 게 아니라 공부하다 선생님한테 맞은 거라면. 아무리 아프게 맞는다고 해도 내가 씨팔, 하면서 자학까지 했을까. 정제되지 않은 감정들이 쌓여 분노가 되기에 가장 위험한 나이라면 난 열일곱이라고 생각해.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바로 욕이 나오는 나이잖아. 그 시기에는 절망 대신 꿈과 희망을 생각해야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어. 하지만 박복한 현실은 누굴 탓한다고 소멸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혼자 욕이나 할 밖에. 어떤 날은 그게 도움이 됐어. 하지만 대부분의 날, 특히 형에게 욕을 먹거나 청소가 유난히 힘들거나 하품이 자꾸 나올 때에는 아무리 혼자 욕을 해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 거야. 결국 포기했어. 그리고 그냥... 그냥 견뎠어. 감당하거나 맞서는 게 아니라 가만히 있는 거. 불행이라는 상대가 이제 그만 나를 비껴 가 주기만을 바라며 그냥 견디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