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계획이 계획인 하루
오늘은 가장 오래 머문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시드니 시내를 떠나 제틀랜드로 이동하는 날이다. 투어도 없고 계획도 일정도 없어 여유롭게 하고 싶은 걸 하면 된다. 유일한 계획으로 ‘마막에서 점심 먹기’가 있어 그에 맞춰 동선을 짰다. 가보고 싶은 동네를 둘러보고 돌아와 마막을 먹은 뒤 다음 숙소로 이동하기로 했다. 가보고 싶은 동네는 시드니 대학교가 있는 뉴타운, 본다이비치 등이 남아있었지만 맛집이 많이 저장된 서리힐스로 정했다.
서리힐스에 도착해 처음 방문한 가게는 정거장 근처의 ‘Lode Pies & Pastries’라는 가게였다. 분홍 간판과 인테리어에 공주님들이 방문하는 곳인가 싶어 조금 기가 죽었지만 맛집이라 이겨냈다. 디저트가 될만한 페스츄리부터 미트파이까지 종류가 많아서 고민하는 동안에도 손님들이 많이 왔다. 로컬 맛집 같아 더욱 믿음이 갔다. 나는 앞 손님을 따라 시나몬롤과 피콜로를, 오빠는 치킨 파이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골랐다. 시나몬롤은 맛이 없을 수 없는 조합인데 페스츄리 결이 바삭하게 살아있었다. 피콜로는 진한 라떼였는데 커피에 우유 조합이라 그런지 슬슬 배가 아파왔다. 직원에게 화장실을 물어봤는데 가게에는 없다며 근처 도서관 화장실을 알려줬다.
이때부터 화장실을 따라 우리의 산책이 시작되었다. 도서관은 몇 블록 아래에 있었는데 10시 전이라 열지 않았다. 10분 동안 근처를 배회하다 도서관이 열리자마자 화장실로 향했다. 나와서는 도서관을 구경했는데 너무 특별한 경험이었다. 외국에서 서점은 들러도 도서관을 가본 적은 처음이었다. 어떤 책들이 있는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등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제목만으로 궁금한 책을 꺼내보고 가능한 만큼 읽었다. 1층 창가 쪽에 ‘ZINES’ 코너가 있어 한참을 구경했다. 지역 도서관에 개인의 이야기를 담은 zine이 있고 이를 잘 보이는 위치에 진열해 둔 것만으로도 의미 있다고 느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언젠가 이런 코너가 생길까 기대하며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다음은 ‘Lavie & Belle Bakery Surry Hills’ 베이커리로 갔다. 프랑스 빵을 파는 곳이라 바게트와 디저트가 많았는데 우리는 까눌레와 아몬드 크로와상을 샀다. 가게 밖의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빵을 먹었는데 오랜만에 제대로 된 까눌레라 감동하며 먹었다. 맛보다 더 좋았던 건 그냥 온전히 그 하루를 즐기고 있는 우리였다. 좋은 날씨에 우리가 원하는 만큼 걷고 보고 즐기는 이 시간이 정말 좋았다. 지금까지 우리가 계획하고 선택한 일정을 보내왔지만 드디어 이제야 우리만의 시간을 보내는 기분이었다.
가게에서 나와 발길 닿는 대로 가려는데 다시 화장실 문제가 생겼다. 지도에서 검색하니 근처 하이드 공원의 화장실이 나왔다. 느슨하지만 빠르게 공원으로 걸어갔다. 공원에 도착하니 햇살이 예쁘게 내리쬐고 있어 어디든 예뻤다. 사진 찍으며 걷다 보니 공원 옆 박물관 근처까지 가게 되었다. 공원보다 박물관 화장실이 낫겠다 싶어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찾아보니 공룡부터 광물까지 다양한 주제의 전시가 있는 큰 박물관이었다. 들어온 김에 화장실도 박물관도 야무지게 둘러봤다.
화장실을 찾다가 도서관부터 박물관까지 예상치도 못한 공간에 방문했는데 오히려 너무 좋았다. 오빠랑도 이야기했는데 이 순간 덕분에 뉴질랜드와 비등하게 호주가 좋아졌다. 박물관에서 나와 세인트 메리 대성당까지 야무지게 보고 숙소 쪽으로 이동했다. 여유로운 오전 시간을 보낸다고 마막에 오니 1시가 넘었다. 내내 먹으며 돌아다녔기 때문에 가볍게 볶음밥과 꼬치만 시켰다. 볶음밥이 맛있는 건 당연했고 이번에는 꼬치와 함께 나온 장이 나의 킥이었다. 된장도 쌈장도 아닌 묘하게 끌리는 달큰한 맛인데 생각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인다. 마막을 먹고 QVB의 헤이그 초콜릿 가게를 들려 소소한 기념품을 산 뒤에 숙소로 돌아왔다. 오전 시간을 알차게 보내서 벌써 다음 숙소의 체크인 시간에 가까웠다.
편하게 이동하기 위해서 우버를 불렀다. 영어가 짧아 많은 대화를 나눌 순 없었지만 기사님께 넷플릭스 시리즈도 추천하며 숙소에 도착했다. 체크인하고는 숙소에 큰 감동을 받았는데 통창에 펼쳐진 뷰가 좋았을 뿐 아니라 식탁 위에 허니문을 축하하는 이벤트가 있었다. 직접 쓴 카드와 와인잔에 풍선이 매달려 있었는데 냉장고를 열어보니 와인이 있었다. 신혼여행 중 이렇게 신경 써준 숙소는 처음이라 더 감동이었다. 또, 생각보다 숙소가 더 큰 것 같아 확인해 보니 업그레이드되어 방이 하나 더 있는 거였다. 뷰도 좋고 침실도 두 개나 있고 폭신한 소파에 너른 식탁까지 신혼여행을 마무리하는 숙소로 완벽했다.
내일까지 숙소와 마트를 제외하곤 어느 곳도 가지 않고 쉴 예정이다. 낮잠을 자고 수영을 하고 같이 거실 소파에 앉아 책도 함께 읽고 마트에서 장 봐서 요리도 해 먹고 쉬는 일정도 빡빡하다. 한국에 돌아갈 준비도 조금씩 했는데 광주로 인사하러 갈 예정이라 광주행 비행기를 예약하고 서울에서는 어떻게 이동할지도 이야기했다. 저녁은 계란으로 황금볶음밥을 만들고 고기와 야채를 구워 먹었다. 한동안은 소고기 근처도 안 가도 될 정도로 매일매일이 고기 파티다. 고기 가격과 질보다 더 놀라운 건 호주의 과일인데 얼굴만 한 멜론이 오천 원, 망고가 삼천 원밖에 안 해 이제부터라도 혼쭐을 내자며 양껏 사 먹었다.
<신혼여행 이야기책 제작을 위한 질문>
Q. 오늘 먹은 디저트는 어땠나요?
Q. 새삼 신혼여행이라는 게 실감 난 순간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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